숭례문 복구 도왔던 장인들 "사명감으로 힘든 줄 모르고 일했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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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숭례문 화재'의 교훈…"전통 기법·재료 의미·중요성 깨달아"
맥 끊어진 전통 단청은 '과제'…"정기적 점검 중, 최근 큰 변화 없어" 지난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국보 숭례문(崇禮門) 주변으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금방 잡힐 듯했던 연기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불길도 서서히 몸집을 키워갔다.
지붕 위로 불길이 솟구치는 상황, 목조 부분인 문루(門樓·문 위에 세운 높은 다락)가 화염에 휩싸여 재로 변해가던 중 무게가 100㎏이 넘는 나무 현판이 땅에 떨어졌다.
어느덧 15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숭례문 화재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서울을 대표하는 명소이자 국보로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던 문화유산이 한순간 사라졌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화마의 상처를 딛고 2013년 5월 숭례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지 거의 10년이 되어 간다.
약 5년 3개월 간의 공사를 거치면서 숭례문은 화재 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 됐다.
문 서쪽에 16m, 동쪽에 53m 길이의 성벽을 갖추게 됐고 지붕 형태도 일부 변화가 생겼다.
당시 복구공사에 참여한 이들은 지금의 숭례문과 그간의 과정을 어떻게 바라볼까.
쇠붙이를 두드려 모양을 내 기구를 만드는 이른바 '대장장이'로 참여했던 신인영 경기도 무형문화재 야장(冶匠) 보유자는 "역사와 전통을 복원하는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신 보유자는 "숭례문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되찾는데 내 손이 조그만 힘이라도 된다면 장인으로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주 출입로인 아치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에서 양철로 된 철엽(도성이나 지방 읍성의 주 출입문 바깥에 붙이는 얇은 철판)을 발견해 전통 방식으로 복원한 일을 꼽았다.
그는 "현재의 숭례문이 국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이 부각될 때가 있어 송구스럽다"면서도 "문화재 보존과 전통 기술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는 점,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을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한 노고 등을 생각한다면 여전히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석장(石匠) 보유자로 참여한 이재순 장인은 "당시 이루 말할 수 없던 슬픔, 비참함, 황망함이 지금도 생각난다.
복구 작업에 참여했을 때 혼신을 다하자는 각오로 임했다"고 회상했다.
이 보유자는 "몇백 년 동안 자연적인 풍화 작용을 거치며 숭례문을 받쳐온 돌과 비슷한 것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며 "전통 기법을 살려 복구하기로 했는데 어느 정도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이 많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돌을 쌓아 만든 육축 일부가 '조각보'와 비슷해 보일 수 있다고 말하며 "오래된 돌과 새로 더해진 돌을 서로 잘 맞춰서 가능한 제 위치를 지키되 함께 오래오래 육축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불이 났을 때는 정말 슬픔이 그리 클 수 없었지요.
다시 쌓을 때는 고생도 했고, 끝나고 나서는 완벽할 순 없지만, 그때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어요.
전부라 할 수 있을 정도로요.
"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숭례문을 복구하는 과정을 통해 문화재 수리 현장에서 큰 변화를 끌어냈다는 견해도 있다.
숭례문 복구단장을 맡았던 김창준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 이사장은 "숭례문을 복구하면서 전통 기법이나 재료를 문화재 수리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서서히 자리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숭례문 앞을 지날 때마다 전반적으로 공사가 잘 됐다고 자부한다"면서도 "다만 조금 일찍 전통 기법이나 재료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2011년부터 복구와 복원 전반을 관리했던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현 국립문화재연구원)은 "숭례문을 복구하면서 그간 기계화·공업화됐던 문화재 수리 현장의 관행을 전통 재료와 기법으로 돌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 전 소장은 "우리가 도외시했던 전통 재료·기법의 의미나 중요성 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 계기"라고 거듭 강조했다.
물론 과제도 아직 남아있다.
복구공사를 거친 숭례문은 조선 후기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몇 개월 만에 단청이 벗겨져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발생해 '부실시공'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단청 작업을 맡았던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는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았고 보유자 자격도 박탈됐다.
천연 소재 안료와 접착제를 이용한 전통 단청은 산업화 흐름 속에서 1980년대 들어 사실상 소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문화재청은 전통 안료와 접착제인 아교 제작 방법 복원 등 전통 단청 연구를 꾸준히 하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숭례문은 정기적으로 점검과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며 "단청의 경우 최근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맥 끊어진 전통 단청은 '과제'…"정기적 점검 중, 최근 큰 변화 없어" 지난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국보 숭례문(崇禮門) 주변으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금방 잡힐 듯했던 연기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불길도 서서히 몸집을 키워갔다.
지붕 위로 불길이 솟구치는 상황, 목조 부분인 문루(門樓·문 위에 세운 높은 다락)가 화염에 휩싸여 재로 변해가던 중 무게가 100㎏이 넘는 나무 현판이 땅에 떨어졌다.
어느덧 15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숭례문 화재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서울을 대표하는 명소이자 국보로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던 문화유산이 한순간 사라졌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화마의 상처를 딛고 2013년 5월 숭례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지 거의 10년이 되어 간다.
약 5년 3개월 간의 공사를 거치면서 숭례문은 화재 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 됐다.
문 서쪽에 16m, 동쪽에 53m 길이의 성벽을 갖추게 됐고 지붕 형태도 일부 변화가 생겼다.
당시 복구공사에 참여한 이들은 지금의 숭례문과 그간의 과정을 어떻게 바라볼까.
쇠붙이를 두드려 모양을 내 기구를 만드는 이른바 '대장장이'로 참여했던 신인영 경기도 무형문화재 야장(冶匠) 보유자는 "역사와 전통을 복원하는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신 보유자는 "숭례문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되찾는데 내 손이 조그만 힘이라도 된다면 장인으로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주 출입로인 아치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에서 양철로 된 철엽(도성이나 지방 읍성의 주 출입문 바깥에 붙이는 얇은 철판)을 발견해 전통 방식으로 복원한 일을 꼽았다.
그는 "현재의 숭례문이 국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이 부각될 때가 있어 송구스럽다"면서도 "문화재 보존과 전통 기술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는 점,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을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한 노고 등을 생각한다면 여전히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석장(石匠) 보유자로 참여한 이재순 장인은 "당시 이루 말할 수 없던 슬픔, 비참함, 황망함이 지금도 생각난다.
복구 작업에 참여했을 때 혼신을 다하자는 각오로 임했다"고 회상했다.
이 보유자는 "몇백 년 동안 자연적인 풍화 작용을 거치며 숭례문을 받쳐온 돌과 비슷한 것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며 "전통 기법을 살려 복구하기로 했는데 어느 정도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이 많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돌을 쌓아 만든 육축 일부가 '조각보'와 비슷해 보일 수 있다고 말하며 "오래된 돌과 새로 더해진 돌을 서로 잘 맞춰서 가능한 제 위치를 지키되 함께 오래오래 육축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불이 났을 때는 정말 슬픔이 그리 클 수 없었지요.
다시 쌓을 때는 고생도 했고, 끝나고 나서는 완벽할 순 없지만, 그때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어요.
전부라 할 수 있을 정도로요.
"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숭례문을 복구하는 과정을 통해 문화재 수리 현장에서 큰 변화를 끌어냈다는 견해도 있다.
숭례문 복구단장을 맡았던 김창준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 이사장은 "숭례문을 복구하면서 전통 기법이나 재료를 문화재 수리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서서히 자리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숭례문 앞을 지날 때마다 전반적으로 공사가 잘 됐다고 자부한다"면서도 "다만 조금 일찍 전통 기법이나 재료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2011년부터 복구와 복원 전반을 관리했던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현 국립문화재연구원)은 "숭례문을 복구하면서 그간 기계화·공업화됐던 문화재 수리 현장의 관행을 전통 재료와 기법으로 돌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 전 소장은 "우리가 도외시했던 전통 재료·기법의 의미나 중요성 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 계기"라고 거듭 강조했다.
물론 과제도 아직 남아있다.
복구공사를 거친 숭례문은 조선 후기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몇 개월 만에 단청이 벗겨져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발생해 '부실시공'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단청 작업을 맡았던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는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았고 보유자 자격도 박탈됐다.
천연 소재 안료와 접착제를 이용한 전통 단청은 산업화 흐름 속에서 1980년대 들어 사실상 소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문화재청은 전통 안료와 접착제인 아교 제작 방법 복원 등 전통 단청 연구를 꾸준히 하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숭례문은 정기적으로 점검과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며 "단청의 경우 최근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