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사람의 얼굴도, 타인과의 약속도 잘 기억해내지 못해 메모라도 해야 일상생활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져서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상황. 그에게 익숙한 이런 경험이 자폐의 한 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서른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최근 출간된 '걸을 때마다 조금씩 내가 된다'(웅진지식하우스)는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영국 작가 캐서린 메이가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기록한 에세이다.
2018년 영미권에서 출간된 책으로, 이번에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돼 소개됐다.
책에 따르면 저자는 그동안 엄마, 아내, 작가로서 그럴듯한 삶을 살아갔지만, 그 삶이 진짜 삶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매일 마주하는 일과 육아, 인간관계에 짓눌렸다.
자신의 마음을 다독일 여력조차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삶은 제자리를 맴돌았지만, 마음은 늘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서 어디로 가야 할지 저자는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해방감은 그보다 더 컸다.
사방에서 숲이 자라고 변화하면서 내뿜는 자연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은 방황하는 그에게 길을 제시해 주는 듯했다.
"한 아이의 엄마인 내게 세상은 결코 오롯이 나 자신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야 함을 확인했다.
" 자연의 소리를 더 듣고자 저자는 영국의 가파르고 험준한 트래킹 코스 사우스웨스트 코스트 패스를 걷기 시작했다.
걸으며 라디오를 듣던 중 아스퍼거 증후군에 시달리는 한 환자의 인터뷰를 듣게 됐고, 자신도 동일한 질환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사회적으로 주고받는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행동이나 관심 분야, 활동 분야가 한정되는 발달장애의 일종이다.
그제야 비로소 삶의 비밀이 풀렸다.
어릴 적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였던 성향, 힘든 상황이 닥칠 때마다 나만의 공간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행동,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엄마들과 달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 등이 그저 민감해서가 아니라 병 때문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제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선다.
완치가 어렵다는 걸 알지만 "본래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 삶의 각도를 다시 '조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문에서 자폐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폐를 가진 우리는 책 속에서 흔히 묘사하듯 멍하고 무감각한 로봇 같은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재미있고 다정하며 공감 능력도 높다.
단지 뇌가 조금 다르게 작동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종종 지독히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뿐이다.
"
이유진 옮김. 376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