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렇게 긴장하면서 서 있습니다.
"
무대 위로 '번쩍번쩍' 빛나는 금색 갑주를 두른 나훈아가 등장했다.
그냥 등장한 게 아니라 한 손엔 금색 마이크를, 다른 한 손엔 성인 키만 한 커다란 칼을 든 채 검은색 말을 타고 걸어 나왔다.
부리부리한 눈, 다부지게 다문 입, 운동으로 다져진 몸, 트레이드 마크가 된 뒤로 '질끈' 묶은 은빛 머리카락과 수염. 그의 노래 제목처럼 세월과 '맞짱'을 겨뤄 이긴 듯한 풍채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바로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나훈아의 데뷔 55주년 기념 콘서트 '드림(DREAM) 55' 서울 공연에서다.
나훈아는 객석을 꽉 채운 팬들을 그윽이 바라보며 "제 앞의 이 마이크는 저의 청춘이었고 세월이었으며 제 인생의 전부였다"고 데뷔 55주년을 맞은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서울로 공부한다고 올라와 어찌어찌 가수가 됐다"면서도 "연예인과 어울리지 않게 고집이 세고, 속에 없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는, 부러질 것 같은 좋지 못한 성격임을 자인한다"고 털어놨다.
나훈아는 그렇지만 "55년간 한 번도 하지 못한 한마디를 이 자리를 빌려서 한다"며 "여러분을 사랑한다"며 팬을 향한 고마움을 드러냈다.
나훈아는 호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처럼 이날 공연도 화려한 볼거리를 쏟아내며 관객이 한눈파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연의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직접 기획했다고 했다.
붉은 수도복 차림으로 처음 등장해 히트곡 '테스형'으로 포문을 연 나훈아는 첫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노래 '체인지'를 부르며 춤도 춰 박수갈채를 받았다.
마치 아이돌 가수처럼 헤드셋 마이크를 차고 두 손을 활용해 왼쪽, 오른쪽, 그리고 가운데를 가리킬 때마다 관객의 시선은 저절로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예매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명성처럼 이날 공연장 주변은 이른 시각부터 전국 각지에서 온 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중장년층이 주를 이뤘지만, 모녀 혹은 아예 3대가 함께 온 이들도 있었다.
나훈아는 2시간 30분에 가까운 공연 시간 동안 '홍시', '공', '고향역', '해변의 여인' 등 세대를 아울러 두루 사랑받는 히트곡을 줄줄이 뽑아냈다.
그는 간드러지게 고음을 '쓱' 뽑아낸 뒤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가, 날렵하게 뒤로 '착' 돌아 리듬을 탔다.
노래를 끝마치고서는 황금색 마이크에서 입을 뗀 뒤 한숨을 '푸'하고 쉬고는 '바르르' 몸을 한번 떨었다.
여느 아이돌의 '엔딩 포즈' 못지않은 재간에 어르신 관객들은 어느덧 소녀 팬으로 돌아갔다.
그는 관객들을 능수능란하게 울렸다가 웃겼다.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는 절절한 가사로 잘 알려진 히트곡 '홍시'의 하모니카 사운드는 이날 유난히 더 슬프게 들렸고, 관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훔쳤다.
나훈아가 이 슬픈 노래를 되레 엷은 미소를 띤 채 지긋이 불렀기에 그 먹먹함은 배가 됐다.
20·30대 '요즘 가수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도 없는 '가황'(歌皇)의 노하우인 셈이다.
나훈아는 그러다가도 "공연을 하다 보니 관객들이 부쩍 나이가 들어서 깜짝 놀랐다.
할머니가 나보고 '오빠'하고 외치더라"며 "나도 내가 이렇게 (가수를) 오래 할 줄은 몰랐다"고 너스레도 떨었다.
나훈아가 마치 프레디 머큐리처럼 찢어진 청바지에 흰색 민소매 차림으로 '청춘을 돌려다오'를 열창하자 장내의 분위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그는 관객을 향해 발차기도 했고, T자형 무대 좌우를 뛰어다니며 땀을 쏟아냈다.
나훈아는 이날 평소 마음에 담아놨던 생각들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원숭이두창 같은 전염병이 인간의 환경 파괴의 산물이라며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 지구를 보호하고 자연을 지킬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꼬집었다.
또 관객들을 향해서는 "세월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안 해본 것을 해야 한다"며 "미니스커트도 입어 보고 힐도 신어 보라"고 팬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강원도 원주에서 오전 11시부터 친구와 함께 공연장을 찾아온 원모(62)씨는 "어릴 때부터 나훈아의 팬"이라며 "소박하면서도 멋있는 미소가 너무나 좋다.
오늘 히트곡 '공'을 듣고 싶어서 왔다"고 말하며 즐거워했다.
인천 강화에서 딸과 함께 공연을 즐긴 권모(61)씨는 "나훈아는 노래하는 매너가 최고"라며 "이 공연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딸이 함께 와 줬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의 마무리 역시 나훈아다웠다.
앙코르곡 '갈무리'를 마지막으로 이 같은 말을 남기고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무대 뒤로 뛰쳐나갔다.
"여러분 집에 가시면 (티켓팅하느라 고생한) 아들·딸에게 꼭 고맙다고 전해주십시오. 자, 이제 공연 끝났으니 다들 집으로 가십시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