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국진 선생 사사해 금속활자와 인연…"어렵고 힘들어도 행복 느껴"
[※ 편집자 주 = 자고 나면 첨단제품이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옛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도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않더라도 조상의 혼이 밴 전통문화를 후대에 전수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들이 선보이는 전통문화의 가치와 어려운 여건에도 꿋꿋하게 외길을 걷는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과 예우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충북 장인열전'을 매주 금요일 송고합니다]
장인의 손동작은 날렵하고 노련했다.
주위에 빙 둘러선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응시했다.
장서인(책 도장) 제작 시연을 마친 장인은 굵은 땀을 뚝뚝 흘렸다.
몸에서는 흙내음도 나는듯했다.
무슨 시연인지 묻는 기자에게 그는 "주물사주조법으로 지구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금속활자를 만드는 체험 행사"라며 "1천여 명이 신청했는데 그 중 100명이 10회로 나눠 참여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고인쇄의 고장'인 청주가 자랑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 임인호(59)씨다.
체험프로그램 장소인 청주시금속활자전수교육관에서 만난 임씨는 "참여자들이 미리 시안을 주면 양각 작업을 해 교정을 한다.
그다음에 본인들이 직접 주형틀을 다지고 1천200도의 쇳물을 붓고 결과물을 다듬는 과정을 거쳐 나만의 도장을 완성한다"고 부연했다.
이렇게 제작된 장서인은 올해 9월 열리는 직지문화제 행사장에 전시된다.
임씨가 관장으로 있는 금속활자전수교육관은 우리의 빛나는 문화유산인 금속활자 제작기술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공간이다.
정기적으로 금속활자 주조 과정을 시연하고, 옛 책 만들기, 죽간 만들기 체험 등을 진행한다.
20여명이 이곳에서 금속활자 제조법을 배우고 있다.
유미숙 실장과 임씨의 아들 규헌(31)씨는 이미 이수자의 지위에 올랐다.
임씨는 금속활자 대가였던 스승 오국진(1944∼2008) 선생이 재현한 밀랍주조법을 더 발전시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약칭 직지) 금속활자를 복원한 주인공이다.
직지 자체는 고려의 승려 백운화상이 편저한 불교 서적이다.
직지가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이기 때문이다.
직지는 우왕 3년(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상·하권으로 간행됐다.
간행 때 쓰인 금속활자는 남아있지 않지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금속활자본 하권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이 하권 맨 마지막 장에 '선광7년정사7월 일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는 글귀가 있다.
주자인시는 쇠붙이를 녹여 부어 만든 활자로 찍어 배포했다는 뜻이다.
금속활자 기술로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무려 78년 앞섰다.
국내외 어딘가에 또 다른 직지 금속활자본이 존재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주시 고인쇄박물관이 우리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직지 금속활자를 전통 방식대로 복원하기로 하고 그 대업을 임씨에게 맡겼던 배경이다.
2011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무설조각실에서 작업에 착수했던 임씨는 5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장인정신을 발휘한 끝에 2015년 말 직지 상·하권 78장 3만여자를 복원했다.
임씨는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작업이었다.
(직지 금속활자본과 목판본 등을 참고해) 24시간 글씨 새기고 틀 만들고 쇳물 붓기를 반복했다.
5년간 잠을 잊었다"고 당시의 고통을 회상했다,
이어 웃음기 띤 얼굴로 "복원작업 후 하체마비 증상으로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며 "다시 하라면 엄두도 못 낸다"고 손사래 쳤다.
쇳물이 바지에 튀어 불이 붙었는데도 쇳물을 주형에 붓느라 제때 끄지 못해 다리에 화상을 입은 일도 있었다.
임씨는 밀랍주조법으로 직지 활자를 복원했다.
밀랍은 꿀을 채취한 후 남은 벌집을 물에 끓여 추출한다.
직지 금속활자를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공식기록은 없다.
하지만 밀랍을 이용하지 않고는 입체적인 활자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
그는 "직지 원본의 오와 열, 활자 크기, 활자의 상호 침투 등 여러 정황도 있지만, 직접 만들어본 결과 밀랍주조법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밀랍주조법은 밀랍대에 글자본 붙이기, 밀랍자 만들기(글자 양각), 밀랍가지 만들기, 주형 만들기, 쇳물 붓기, 활자 다듬기, 조판, 인출의 과정을 거친다.
그는 직접 토종벌도 사육하거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밀랍을 확보했다.
직지 활자 복원에 든 밀랍 무게만 수백㎏은 족히 넘는다.
밀랍봉에 글자 100∼150자를 붙이고, 역시 천연재료인 황토, 모래, 석비레를 적당한 비율로 반죽한 뒤 건조와 가열 과정을 반복하면서 갈라지지 않는 주형을 만드는 게 핵심기술이다.
그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기술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가 청출어람 소리를 들으며 고려 시대 사람으로 돌아가 선조들의 지혜를 재현한 직지 활자는 금속활자전수교육관 맞은 편의 청주시고인쇄박물관 로비에 위풍당당하게 전시돼 있다.
임씨는 "금속활자 제조 원리를 스승님이 다 밝히셨다.
저는 스승님의 유지를 받들고 그분이 가시고자 했던 길을 갈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그는 스승이 살아계셨다면 직지 활자를 복원한 제자를 대견해했겠느냐는 질문에 대뜸 "칭찬보다는 냉정하게 잘못된 점을 지적하셨을 것"이라며 "스승님의 엄한 가르침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향 연풍에서 서각 작업을 하던 1996년 오국진 선생과 인연이 닿았다.
이듬해부터 선생의 문하생이 돼 본격적으로 금속활자 제조법을 배웠다.
2004년 3월 금속활자장 전수교육 조교로 지정돼 국내외 금속활자 주조 시연 등 왕성한 대외 활동에 나섰고, 2006∼2010년에 계미자 등 조선 왕실 주조 금속활자 45종을 복원했다.
금속활자 제작 과정을 능숙하게 시연하고, 밀랍주조법 등의 핵심기술을 전통적 방법으로 수행하는 점을 인정받아 2009년 12월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됐다.
임씨는 금속활자장의 삶에 대해 "(주물사주조법을 쓸 때) 모래 속에서 활자를 끄집어내면 자국이 남는데 그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며 "쇳물을 붓고 나면 시험 성적표 기다리는 학생들처럼 초조하고 불안한데 활자가 잘 나오면 성취감을 느낀다.
제가 이 길을 가는 이유"라고 힘줘 말했다.
"어렵고 힘들고 돈이 되지 않아도 나만의 행복을 느낀다"는 대목에서는 장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는 "앞으로도 전통 금속활자 제조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전수 활동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취미를 넘어 금속활자를 업으로 하는 친구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관련 수요가 창출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