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기듯 금기를 드러내고 폭력이 난무하는 기존 작품과는 다를 것이라는 풍문이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졌다.
역하고 거북한 장면도, 베드신도 하나 없다.
한데 그 어떤 전작보다 깊은 고통을 남기는 건 왜일까.
두 남녀의 불가해한 사랑을 눈으로 좇다 보면 마지막에는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더미처럼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3일(현지시간)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대극장 뤼미에르에서 처음 상영한 '헤어질 결심'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어른들의 '품위' 있는 멜로 드라마다.
사랑이라는 단순한 단어 뒤에 숨은 얽히고설킨, 복잡 미묘한 여러 감정을 138분간의 서사로 완벽하게 묘사한다.
박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폭력성과 선정성 없이도 자신이 얼마나 영화를 잘 만들 수 있는지를 입증한 것 같다.
그는 상영이 끝난 뒤 "길고 지루하고 구식의 영화를 환영해주셔서 감사하다"며 겸양했지만, '헤어질 결심'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남기 충분해 보인다.
관객들 역시 장내가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 5분간 쉬지 않고 손뼉을 쳤고 박 감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기립 박수를 보냈다.
주인공은 강력계 형사 해준(박해일 분)과 한국에 들어와 사는 중국인 여자 서래(탕웨이)다.
서래의 남편이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을 해준이 수사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된다.
해준은 "남편이 산에 가서 안 오면 '마침내' 죽을까 봐 걱정했다"는 서래의 말을 듣자마자 그를 의심한다.
남편에게서 당한 모진 폭행과 학대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의심은 더욱 커진다.
그때부터 해준은 서래를 감시한다.
노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서래가 무슨 요일에 누구를 돌보는지, 결혼반지는 뺐는지, 저녁 식사로는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서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그런데 어쩐지 서래를 바라보는 해준의 눈빛이 묘하다.
감시가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을 마음껏 눈에 담는 것 같은 모습이다.
서래도 마찬가지다.
경찰서에서 만난 해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흘깃 보고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인다.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그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인 용의자를 잡으러 간 해준을 걱정스러운 듯 몰래 따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쉽게 마음을 고백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심중을 잘 알면서도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나간다.
해준이 서래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면서 비로소 둘은 관계를 발전해나갈 수 있게 된다.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해준은 서래가 알리바이를 철저하게 꾸며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자신을 이용했다는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형사가 "여자에 미쳐" 프로페셔널함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해준은 서래를 체포하는 대신 증거물인 휴대전화를 건네주며 바다 깊은 곳에 버리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진다.
13개월 후, 이들은 안개가 자욱하기로 유명한 한 도시에서 마주친다.
해준 옆에는 17년을 함께 산 아내(이정현)가, 서래 옆에는 새로운 남편(박용우)이 있는 상태다.
살인범과 살인범을 풀어준 형사.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정말로 헤어질 수 있을까.
줄거리만 봐서는 그간 익히 보고 들었던 금지된 사랑을 그린 비극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은 뻔한 멜로와는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한다.
작은 요소들이 촘촘하게 쌓아 올려지면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로 거침없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얼핏 극단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디테일을 유심히 봐야만 하는 이유다.
미학적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하다.
두 주인공의 요동 치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과감한 카메라 움직임과 박찬욱만의 색채가 묻어나는 미술, 정훈희가 부르는 '안개'는 완벽하게 조화된다.
탕웨이와 박해일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는 오는 28일까지 칸영화제를 통해 상영되며 국내에서는 다음 달 29일 개봉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