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790년 전 용인에서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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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알아가는 용감한 사람들의 이야기
-790년 전 용인에서 있었던 일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로 인정받아 2020년 특례시가 된 용인.

오늘날의 경기도 용인시 남사읍에선 지금으로부터 약 790년 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고려 시대 수원, 화성, 용인 지역을 관할하던 행정구역인 수주(水州)의 처인부곡에서 일어난 처인성 전투입니다.

1229년, 몽골의 살리타가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고 1231년(고종 18년) 8월, 개경이 포위됐습니다.

이듬해 6월, 최우 정권은 비밀리에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는데요.

1232년 1월, 철군하던 몽골군은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명분 삼아 2차 침략을 했습니다.

대구 부인사에 소장된 <초조대장경>이 소실되고 백성이 상당한 피해를 보았죠.

그러나, 남경 점령 후 광주성으로 진격한 살리타 군대는 이세화 목사의 지휘하에 강하게 저항하던 광주산성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광주성을 포기하고 남하하던 중, 12월 처인부곡에 당도한 것입니다.

당시 처인부곡은 지리적·군사적으로 중요했습니다.

고려 시대 역원제도에 따르면 개경에서 평택, 안성 방면이나 남쪽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 이전부터 군량미, 식량 저장 및 보급의 기지로서 기능을 담당했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선 처인성에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인 '군창'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처인성에선 백현원 승려였던 김윤후가 처인 부곡민과 함께 성을 사수하고 있었습니다.

관군과 중앙의 별초군이 파견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김윤후는 통솔력을 발휘해 지역민과 자발적으로 싸웠죠.

처인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고 몽골군을 이끌던 적장 살리타가 화살을 맞고 사살됐습니다.

당시 몽골은 총사령관이 죽으면 군이 후퇴하는 전쟁 관습이 있었습니다.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포로로 잡히거나 황급히 철수했습니다.

왕은 공로를 치하해 김윤후에게 상장군(上將軍) 벼슬을 내렸는데요.

"싸울 때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헛되게 많은 상을 받겠는가"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공을 양보하고 대신 정6품의 무관 섭랑장(攝郞將)이 됐습니다.

당시 주변에 많은 부곡이 있었는데 처인부곡만이 현으로 승격됐습니다.

경기 이남 지역을 몽골군으로부터 지켜낸 위대한 승리.

온전히 지역민의 자력으로 몽골군을 물리치면서 이후 향·소·부곡 및 일반 농민의 대몽 항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250m 정도. 처인성 앞엔 1979년 세워진 처인성 승첩 기념비가 있는데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서 성벽만 남아 있지만 2020년,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용인에서 화성, 평택으로 이어지는 경기평야 지대 가장자리에 있는 처인성에서 벌어진 전투.

790년 전 고려 역사에서 빛나는 승전지, 용인 처인성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이세영 기자 유세진 작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