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중심 대학서열 기원은 일제강점기 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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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한국 대학의 뿌리, 전문학교'
일제강점기 한반도에는 '대학'이 경성제국대학 하나뿐이었다.
대학처럼 고등교육을 시행한 기관으로는 '전문학교'가 있었다.
대학과 전문학교는 일본 학제에서 비롯됐다.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던 1872년 무렵부터 대학과 전문학교를 구분해 운영했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 기능을 모두 수행했지만, 전문학교는 교육에 집중했다.
교육사 연구자인 김자중 박사는 지식의날개가 펴낸 신간 '한국 대학의 뿌리, 전문학교'에서 "조선은 1894년 제정한 '학무아문 관제'를 통해 대학과 전문학교를 규정했지만,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관계 법령에 따른 전문학교가 설립됐다"고 설명한다.
한반도의 전문학교는 1916년 최초로 관립 3곳이 만들어졌다.
이후 1942년에는 관립 7곳·공립 2곳·사립 11곳으로 늘었다.
1935년 고등교육 기관에 다니는 조선인 가운데 90%가 전문학교 학생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한국 대학 서열의 기원을 전문학교에서 찾는다.
그는 일제가 관립과 사립 전문학교의 경쟁 구도 속에서 관립을 지원하고 관립 졸업생에게 여러 자격을 줬다고 분석한다.
예컨대 경성법학전문학교나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은 고등시험 예비시험이 면제되거나 교원 자격을 받았다.
사립 전문학교들은 관립 전문학교에 주어지는 혜택에서 배제되자 다양한 자격 부여를 요구했다.
저자는 "식민지 고등교육 체제 서열 구조에서 경성제대가 꼭대기에 존재했고, 그 아래에 관립 전문학교와 사립 전문학교 순으로 있었다"며 "사립 전문학교가 아무리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더라도 관립 전문학교보다 높은 서열로 올라서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강조한다.
이어 사립 전문학교가 관립 전문학교보다 교육의 질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서열이 고착화한 배경에 '민족'이 있었다고 짚는다.
저자는 "관립 전문학교는 일본인을 다수 선발했으나, 조선인은 주로 사립 전문학교에 입학했다"며 "관립과 사립 전문학교의 서열 구조는 조선 내에서 일본인에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주고, 조선인에게는 낮은 지위를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서열은 일제가 물러난 뒤에도 지속됐다.
저자는 해방 후 경성제대와 여러 관립 전문학교가 통합돼 국립 서울대로 개편됐고, 서울대와 사립대 간 서열 구조가 그대로 남았다고 본다.
아울러 사립대학 비율이 현저히 높은 현실도 일제 전문학교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1938년 학교 수 기준으로 관학 42%, 사학 58%였는데, 지금 사립대학 비율은 약 80%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저자는 "200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일반 대학의 사립대학 비율이 70%를 넘은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었다"며 다른 학자의 견해를 인용해 "높은 사립대학 비율은 고등교육 대중화를 이끌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등교육 공공성을 위협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336쪽. 1만8천500원.
/연합뉴스
대학처럼 고등교육을 시행한 기관으로는 '전문학교'가 있었다.
대학과 전문학교는 일본 학제에서 비롯됐다.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던 1872년 무렵부터 대학과 전문학교를 구분해 운영했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 기능을 모두 수행했지만, 전문학교는 교육에 집중했다.
교육사 연구자인 김자중 박사는 지식의날개가 펴낸 신간 '한국 대학의 뿌리, 전문학교'에서 "조선은 1894년 제정한 '학무아문 관제'를 통해 대학과 전문학교를 규정했지만,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관계 법령에 따른 전문학교가 설립됐다"고 설명한다.
한반도의 전문학교는 1916년 최초로 관립 3곳이 만들어졌다.
이후 1942년에는 관립 7곳·공립 2곳·사립 11곳으로 늘었다.
1935년 고등교육 기관에 다니는 조선인 가운데 90%가 전문학교 학생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한국 대학 서열의 기원을 전문학교에서 찾는다.
그는 일제가 관립과 사립 전문학교의 경쟁 구도 속에서 관립을 지원하고 관립 졸업생에게 여러 자격을 줬다고 분석한다.
예컨대 경성법학전문학교나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은 고등시험 예비시험이 면제되거나 교원 자격을 받았다.
사립 전문학교들은 관립 전문학교에 주어지는 혜택에서 배제되자 다양한 자격 부여를 요구했다.
저자는 "식민지 고등교육 체제 서열 구조에서 경성제대가 꼭대기에 존재했고, 그 아래에 관립 전문학교와 사립 전문학교 순으로 있었다"며 "사립 전문학교가 아무리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더라도 관립 전문학교보다 높은 서열로 올라서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강조한다.
이어 사립 전문학교가 관립 전문학교보다 교육의 질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서열이 고착화한 배경에 '민족'이 있었다고 짚는다.
저자는 "관립 전문학교는 일본인을 다수 선발했으나, 조선인은 주로 사립 전문학교에 입학했다"며 "관립과 사립 전문학교의 서열 구조는 조선 내에서 일본인에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주고, 조선인에게는 낮은 지위를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서열은 일제가 물러난 뒤에도 지속됐다.
저자는 해방 후 경성제대와 여러 관립 전문학교가 통합돼 국립 서울대로 개편됐고, 서울대와 사립대 간 서열 구조가 그대로 남았다고 본다.
아울러 사립대학 비율이 현저히 높은 현실도 일제 전문학교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1938년 학교 수 기준으로 관학 42%, 사학 58%였는데, 지금 사립대학 비율은 약 80%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저자는 "200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일반 대학의 사립대학 비율이 70%를 넘은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었다"며 다른 학자의 견해를 인용해 "높은 사립대학 비율은 고등교육 대중화를 이끌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등교육 공공성을 위협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336쪽. 1만8천500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