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유도소녀에서 판관으로…25년 만에 올림픽 복귀한 현숙희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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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생 두 번째 올림픽은 심판으로
"다시 서는 올림픽 무대, 가슴이 뭉클…티 안 내려 노력" 특별취재단 = 1996년 7월 26일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콩그레스센터.
만 23세의 앳된 현숙희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애틀랜타 올림픽 유도 52㎏급 결승 무대에 올랐다.
현숙희는 당시 세계 최강, 마리클레르 레스토(프랑스)를 상대했다.
그는 밭다리후리기를 시도하다가 되치기로 유효 1개를 내주면서 아깝게 졌다.
현숙희는 울지 않았다.
취재진 질문에 "다음에 잘하면 된다"면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1년 7월 26일 일본 도쿄 무도관.
만 48세 중년이 된 현숙희 심판위원은 두 번째 올림픽 무대에 섰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지 딱 25년째 되는 날이었다.
흰머리가 늘고 얼굴엔 주름살이 생겼지만, 떨리는 마음은 25년 전 그때와 똑같았다.
27일 자정 무렵 어렵게 연락이 닿은 현숙희 위원은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왔다"며 "다시 올림픽 무대에 서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1990년대 여자 유도 간판으로 이름을 날렸던 현숙희 위원은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한 이듬해에 은퇴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은퇴하기엔 너무 어렸다.
많은 사람이 말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팔꿈치 수술 후유증과 허리 통증이 너무 심했다.
현숙희 위원은 선수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시 한번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1998년 전국체전에 출전하며 복귀를 노렸다.
여의치 않았다.
고질적인 부상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올림픽 두 번째 출전의 꿈은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다.
선수 생활을 깨끗하게 단념한 현 위원은 인생의 목표를 다시 잡았다.
은퇴 후 서울 광영여고 체육 지도교사로 부임해 유도부 코치로 활동했다.
선수 생활의 아쉬움이 남아서였을까.
현숙희 위원은 다시 매트에 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심판이었다.
현숙희 위원은 학업을 병행하며 국제심판 자격에 도전했고, 2002년 국제심판 B급 자격시험에 합격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국제심판 A급 자격시험까지 합격하며 꿈의 무대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현숙희 위원이 올림픽 심판으로 임명된 건 지난 2월의 일이다.
국제유도연맹(IJF)으로부터 올림픽 심판으로 발탁됐다는 이메일 한 통을 받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현숙희 위원은 "그동안 (심판으로서) 올림픽 무대를 밟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이 스쳐 지나갔다"라며 "다시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흥분할 틈이 없었다.
현 위원은 곧바로 올림픽 준비에 들어갔다.
25년 전 애틀랜타 올림픽을 대비하는 심정으로 많은 준비를 했다.
정확하고 공정한 판결을 위해 수많은 상황을 놓고 훈련했다.
현 위원은 "올림픽 무대가 선수들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며 "내 실수 하나로 인생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준비과정에서 목표도 세웠다.
첫 번째 올림픽의 목표가 금메달을 획득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올림픽의 목표는 아무런 조명을 받지 않는 것이다.
현숙희 위원은 "심판에게 가장 큰 상은 판정에 관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며 "대회가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림픽 유도 심판은 총 16명이다.
대륙별로 인원을 배분하는데 유럽에 7장, 아메리카에 3명,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에 각각 1명, 아시아에 4명이 부여된다.
현숙희 위원은 한국 심판으로는 유일하게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임원까지 포함하면 전기영 IJF 수석 심판위원장과 함께 2명의 한국 유도인이 올림픽 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 위원은 자신의 꿈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남편과 세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현 위원의 남편은 대학부터 교제한 유도 선수 출신의 김영곤 씨다.
둘째 아들은 농구 청소년 국가대표 포워드 김태훈(192㎝·고려대)이다.
/연합뉴스
"다시 서는 올림픽 무대, 가슴이 뭉클…티 안 내려 노력" 특별취재단 = 1996년 7월 26일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콩그레스센터.
만 23세의 앳된 현숙희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애틀랜타 올림픽 유도 52㎏급 결승 무대에 올랐다.
현숙희는 당시 세계 최강, 마리클레르 레스토(프랑스)를 상대했다.
그는 밭다리후리기를 시도하다가 되치기로 유효 1개를 내주면서 아깝게 졌다.
현숙희는 울지 않았다.
취재진 질문에 "다음에 잘하면 된다"면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1년 7월 26일 일본 도쿄 무도관.
만 48세 중년이 된 현숙희 심판위원은 두 번째 올림픽 무대에 섰다.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지 딱 25년째 되는 날이었다.
흰머리가 늘고 얼굴엔 주름살이 생겼지만, 떨리는 마음은 25년 전 그때와 똑같았다.
27일 자정 무렵 어렵게 연락이 닿은 현숙희 위원은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에 왔다"며 "다시 올림픽 무대에 서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1990년대 여자 유도 간판으로 이름을 날렸던 현숙희 위원은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한 이듬해에 은퇴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은퇴하기엔 너무 어렸다.
많은 사람이 말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팔꿈치 수술 후유증과 허리 통증이 너무 심했다.
현숙희 위원은 선수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시 한번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1998년 전국체전에 출전하며 복귀를 노렸다.
여의치 않았다.
고질적인 부상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올림픽 두 번째 출전의 꿈은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다.
선수 생활을 깨끗하게 단념한 현 위원은 인생의 목표를 다시 잡았다.
은퇴 후 서울 광영여고 체육 지도교사로 부임해 유도부 코치로 활동했다.
선수 생활의 아쉬움이 남아서였을까.
현숙희 위원은 다시 매트에 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심판이었다.
현숙희 위원은 학업을 병행하며 국제심판 자격에 도전했고, 2002년 국제심판 B급 자격시험에 합격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국제심판 A급 자격시험까지 합격하며 꿈의 무대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현숙희 위원이 올림픽 심판으로 임명된 건 지난 2월의 일이다.
국제유도연맹(IJF)으로부터 올림픽 심판으로 발탁됐다는 이메일 한 통을 받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현숙희 위원은 "그동안 (심판으로서) 올림픽 무대를 밟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이 스쳐 지나갔다"라며 "다시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흥분할 틈이 없었다.
현 위원은 곧바로 올림픽 준비에 들어갔다.
25년 전 애틀랜타 올림픽을 대비하는 심정으로 많은 준비를 했다.
정확하고 공정한 판결을 위해 수많은 상황을 놓고 훈련했다.
현 위원은 "올림픽 무대가 선수들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며 "내 실수 하나로 인생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준비과정에서 목표도 세웠다.
첫 번째 올림픽의 목표가 금메달을 획득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올림픽의 목표는 아무런 조명을 받지 않는 것이다.
현숙희 위원은 "심판에게 가장 큰 상은 판정에 관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며 "대회가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림픽 유도 심판은 총 16명이다.
대륙별로 인원을 배분하는데 유럽에 7장, 아메리카에 3명,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에 각각 1명, 아시아에 4명이 부여된다.
현숙희 위원은 한국 심판으로는 유일하게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임원까지 포함하면 전기영 IJF 수석 심판위원장과 함께 2명의 한국 유도인이 올림픽 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 위원은 자신의 꿈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남편과 세 아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현 위원의 남편은 대학부터 교제한 유도 선수 출신의 김영곤 씨다.
둘째 아들은 농구 청소년 국가대표 포워드 김태훈(192㎝·고려대)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