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마라
양광모
비가 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고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른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이 막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
인생이란 작은 배
그대, 가야할 곳이 있다면
태풍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
[태헌의 한역(漢譯)]
莫停駐(막정주)
下雨有行處(하우유행처)
禽鳥應飛天(금조응비천)
積雪有行處(적설유행처)
麀鹿當上山(우록당상산)
路遠有行處(노원유행처)
蝸牛不休步(와우불휴보)
道阻有行處(도조유행처)
鰱魚必逆水(연어필역수)
人生卽小舟(인생즉소주)
吾君有行方(오군유행방)
設令颱風起(설령태풍기)
前進向怒洋(전진향노양)
[주석]
* 莫(막) : ~하지 말라. / 停駐(정주) : 멈추다, 멎다.
下雨(하우) : 비가 내리다. / 有行處(유행처) : 가야할 곳이 있다.
禽鳥(금조) : 새. / 應(응) : 응당. / 飛天(비천) : 하늘을 날다.
積雪(적설) : 눈이 쌓이다.
麀鹿(우록) : 사슴, 암사슴. / 當(당) : 응당, 마땅히. / 上山(상산) : 산을 오르다, 산에 올라가다.
路遠(노원) : 길이 멀다.
蝸牛(와우) : 달팽이. / 不休步(불휴보) : 걸음을 멈추지 않다.
道阻(도조) : 길이 막히다.
鰱魚(연어) : 연어. / 必(필) : 반드시. / 逆水(역수) : 물결을 거스르다, 물결을 거슬러 오르다.
人生(인생) : 인생. / 卽(즉) : 즉, 곧, 바로 ~이다. / 小舟(소주) : 작은 배.
吾君(오군) : 그대, 당신. / 有行方(유행방) : 가야할 곳이 있다.
設令(설령) : 가령, ~하다 하더라도. / 颱風起(태풍기) : 태풍이 일어나다, 태풍이 불다.
前進(전진) : 전진하다, 나아가다. / 向怒洋(향노양) : 거친 바다를 향하여, 거친 바다로.
[직역]
멈추지 마라
비가 와도 갈 곳이 있으면
새는 응당 하늘을 날고
눈이 쌓여도 갈 곳이 있으면
사슴은 응당 산을 오른다
길이 멀어도 갈 곳이 있으면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이 막혀도 갈 곳이 있으면
연어는 반드시 물결 거슬러간다
인생이란 작은 배
그대, 가야할 곳이 있다면
설령 태풍이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
[漢譯 노트]
양광모 시인의 이 시는 5연 15행으로 구성된 자유시이지만 각 연마다 3행씩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어 정형시를 떠올리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4연까지는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연과 행이 반복되고 있다. 일견 무척 단조로워 보이는 구성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시인의 의도가 읽혀진다. 시인의 눈길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늘에서 땅으로, 또 땅에서 땅과 물의 경계로, 다시 땅과 물의 경계에서 물속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거기에 사는 생명체를 하나씩 거론하고 있다. 그 생명체가 그 공간에서 대표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러한 장치는 시인이 의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시인이 4개의 연을 통하여 얘기하려고 한 것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살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이다. 그 생명체들은 가야할 곳이 있으므로 기꺼이 위험과 고통을 감내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그리고 그 ‘가야할 곳’은 바로 ‘꼭 해야 할 일’로 이해된다.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인간이나 미물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대개 인간에게만 보이는 의지적인 행동이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본능’이라고 한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다지 위험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데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 위험하고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임에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 있다. 전자가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인간의 한 본능에 충실한 것이라면, 후자는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인간의 의지에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능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의지에 충실할 것인가? 언제나 그 선택은 우리 각자의 몫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의지에 충실하자면 ‘태풍’에 맞서 배를 띄우는 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역자는 지금 이름지어진 가치, 용기를 생각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단연코 용기를 그 동력으로 할 때만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부여될 것이다. 역자는 힘은 주먹에서, 재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마음의 힘이 강인한 자들이 빛나는 역사를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힘은 곧 용기가 아니겠는가! 인생이라는 무대에 서서 집채보다 큰 시간의, 고통의 소용돌이에 정면으로 맞설 때 그는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다.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 과정으로서 역사는 분명 그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낼 것이다. 갈채가 없는 인생은 무덤만큼이나 적막하고 허허롭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원시의 제목처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자는 원시를 12구의 오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원시의 제1연부터 제4연까지는 일률적으로 오언 2구의 한시로 옮겼으며, 제5연은 오언 4구의 한시로 옮겼다. 또 짝수 구마다 압운하면서 4구마다 운을 바꾸었다. 한역시의 압운자는 ‘天(천)’·‘山(산)’, ‘步(보)’·‘水(수)’, ‘方(방)’·‘洋(양)’이다.
2020. 1. 7.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