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자락을 따라 삼청공원 넘어 감사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울이 한눈에 조망되는 서울성곽으로 이어진 와룡공원이 나온다. 와룡공원 넘어 우측 성곽을 끼고 내려가면 혜화문이 나오고 왼편길로 내려오면 성북동이다. 성북동으로 내려오면 만해 한용운이 기거하던 심우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 따라 습기로 축축한 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철대문에 심우장이라는 명패가 붙은 집이 나온다. 조선 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대문과 각을 이루며 북향으로 지어진 심우장을 둘러보니 어려운 시대 상황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곧은 기상이 서린 시집<님의침묵>을 발표한 한용운의 혼이 느껴진다. 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지금도 많은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그의 시에 서린
기상이 아직 우리 마음을 흔들기 때문이리라.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수행하며 민족을 걱정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까지 기거한 처소에 잠시 앉아
창밖을 보니 세상이 한 눈에 들어왔다. 깊은 산중이 아닌 세상 가까이서 수행하며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한 시인이며 승려이기도 한 한용운의 삶을 돌이켜보다 향 하나 피워 놓았다.
한용운의 자필로 쓰여진 <마저절위>는 공이가 다 닳아 없어지도록 갈고 가죽끈이 끊어지도록 책을 보라. 즉 끝없이 연마라하는 뜻이다. 이 글귀를 담고 마당에 한용운이 심었다는 향나무에게 안부를 전하고 돌아섰다. 돌아 오는 길에 백발의 중년을 넘긴 서양인이 안내책자에 의지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심우장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