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고집은 간극이 넓지 않다. 융통성 없는 믿음은 고집이고, 융통성 있는 고집은 믿음이다. 세상에는 허구적 믿음이 허다하다. 영국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은 자아·가족·계층·인류라는 믿음에 오류가 많다고 꼬집었다. 믿음이 실제보다 우아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믿음은 ‘자아’의 굵직한 씨앗이다. 하지만 고집은 단단히 굳어버린 화석이다. 어제에는 맞지만 오늘에는 어긋나는 시대착오적 믿음이다.

춘추시대 노나라에 미생(尾生)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어느 날 미생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늦지 않게 다리 아래로 나갔으나 웬일인지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기다렸고 갑자기 쏟아진 장대비로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마냥 여자를 기다리다 결국 교각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사기≫≪장자≫≪전국책≫≪회남자≫등에 두루 나오는 얘기다.

‘미생의 믿음’이란 뜻의 미생지신(尾生之信)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약속을 굳게 지키는 것을, 하나는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을 비유한다. 말하고자 하는 뜻에 맞춰 인용되지만 후자, 즉 ‘융통성이 없는 고지식함’을 이르는 경우가 많다.

장자는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도척의 입을 빌려 미생의 융통성 없고 어리석음을 통박한다. “이런 인간은 제사에 쓰려고 찢어발긴 개나 물에 떠내려가는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다를 바 없다. 쓸데없는 명분에 빠져 소중한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명분을 본성을 흐리는 찌꺼기쯤으로 여기는 장자다운 일갈이다.

≪전국책≫에서도 미생의 신의는 단지 사람을 속이지 않는 데 불과할 따름이라고 혹평하고,《회남자》에서도 미생의 신의는 차라리 상대방을 속여 순간의 위험을 피하고 후일을 꾀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꼬집었다. 반면 전국시대 종횡가로 이름을 날린 소진은 이 얘기를 들어 연나라 소왕을 설득하며 자신의 신의를 강조했다.
믿음은 껍질보다 알맹이가 중요하다. 알맹이는 무엇을, 왜 믿느냐에 관한 거다. 자신의 이익에만 맞춤한 믿음은 이기심의 우아한 포장일 뿐이다. 약속은 시간과 장소 그 이상이다. 거기엔 상대를 향한 신뢰와 배려, 둘만의 소통과 공감이 오롯이 담겨있다. 하지만 믿음과 약속, 그 어디에도 융통성이 스며들 틈새는 있다.
[바람난 고사성어] 미생지신(尾生之信)-융통성 없는 믿음은 고집일 뿐이다
신동열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