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왕방산(王方山)은 소잔등을 닮아 펑퍼짐한 모양새입니다.
서울에서 철원과 김화로 이어지는 포천 인근 43번 도로 왼편에 우뚝 솟아 있지요.
한북정맥의 지맥인 천보산맥의 여러 봉우리 중 한 봉우리입니다.
축석고개 부근 한북정맥에서 가지를 친 천보산맥은 포천방향으로 회암령을 거쳐
해룡산(661m), 왕방산(737m), 국사봉(754m), 소요산(532m), 종현산(589m)까지,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빚어놓고서 한탄강과 합류하는 영평천에 머리를 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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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드라마 ‘정도전’을 벼락치기(다시보기)로 보고 있던 차, 왕방산에 이성계와 이색의 숨결이 깃들어 있단 사실을 알았습니다.

포천의 진산, 왕방산은 조선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후 왕자들의 골육상쟁 소식을 듣고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산을 찾아 수일간 체류했다 하여 산 이름이 王方山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설이 있지요.
또한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세속을 떠나 이 산으로 들어와 암자를 짓고 은신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더하여 소생의 軍시절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여 작정하고 폭염을 무릅써가며 길을 나선 겁니다.

35년 전, 왕방산을 병풍처럼 두른 X군단사령부 옆 **부대에 근무했었지요.
입대 전 소생의 이력을 알아본 당시 ***군단장께서 “왕방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X군단사령부의 모습을 화폭에 옮겨 보라” 命 하셨습니다.

하명에 따라 이튿날 1호차 쎄단(현대차 마크 포)에 실려 서울 인사동으로 나와 필요한 畵具를 구입했고 부대 내 빈 공간 귀퉁이에 화실을 꾸몄습니다.

에스키스(esquisse)를 위해 여러날에 걸쳐 왕방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43번 도로가로 나와 왕방산을 스케치 했지요.
에스키스를 바탕으로 80호 캔버스에 군단사령부를 품은 왕방산을 그리기 시작, 두어달에 걸쳐 마무리하여 X군단에 넘겼습니다.

당시 물감 산다는 핑계로 위수지역을 벗어나 서울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그런 연유로 오랫동안 머릿 속에 왕방산이 또렷하고 자리잡고 있었던 겁니다.

각설하고, 왕방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포천 읍내에서 호병골을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
포천 시청을 들머리로 하여 오르는 코스,
무럭고개에서 오르는 코스,
오지재고개에서 오르는 코스,
새목고개에서 오르는 코스,
깊이울 유원지에서 오르는 코스,
그리고 대진대학교에서 오르는 코스 등등…

오늘 왕방산 산행은 무럭고개를 들머리로 하여 원점회귀키로 했습니다.
오랫만에 옆지기를 모시고(?) 나서느라 승용차를 움직이는 바람에 능선 종주 산행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짝 ‘간보기’만 하고 날 선선해지면 다시 올라 국사봉, 공주봉으로 쭈욱 걸어 볼 작정입니다.

무럭고개 고갯마루엔 쉼터(매점)와 지근 거리에 샘터가 있습니다.
매점 옆 공터에는 샘물을 긷기 위해 타고 온 차량들로 가득합니다.
간신히 주차를 한 다음, 썬크림을 바르고, 팔토시를 착용하고, 스틱을 조절하고, 신발끈을 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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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엔 ‘절대 서행’이란 큼지막한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도
오가는 차량들은 개의치 않습니다. 보란 듯 굉음을 내며 달립니다.
고갯마루라 양방향에서 달려드는 차량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더욱 위험합니다.
횡단보도 없는 도로를 가로질러 산에 들어야 하는 산객들이나,
공터를 빠져 나가는 차량들이나, 아찔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이곳 쉼터 주인장은 이렇게 푸념하더군요.
“해당 관청에 여러번 지적을 했지요. 그럴때마다 ‘대책을 강구 중’이란 말만 되풀이 하니, 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며 난리부르스 치는 꼴, 이젠 지겹습니다.
해당 지자체 담당 공무원들, 안전불감증에서 깨어나길 바랍니다.

초입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며 걸을 길을 머릿 속에 새깁니다.
무럭고개에서 정상까지는 4.8km, 걷기 편한 육산입니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은, 인체의 근육에 비유해 ‘肉山’, 암릉 산은 인체의 뼈에 비유해 ‘骨山’으로 표현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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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500m나 올랐을까, 옆지기의 엄살이 슬슬 시작됩니다.
날벌레가 너무 달라붙는다, 초입부터 너무 가파르다, 너무 덥다…
뭐, 들판 아닌 다음에야 가파르지 않는 산길이 어디 있으며, 여름 산에 날벌레 앵앵 거리기 일쑤이고, 한 여름에 더운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그래도 모른 척 앞 서 걷습니다. 매정하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시동 걸릴 때만 그렇지, 탄력을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잘 걷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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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 시들음병이 기승을 부리나 봅니다.
나무로 기어 오르는 해충을 막기 위해 등로 주변 참나무 밑둥에 노랑 비닐 끈끈이를 감아 놓았습니다.

간간이 놓여있는 통나무의자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눠가며 완만하게 이어진 호젓한 숲길을 휘적휘적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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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적 드문 산인지, 아니면 폭염 탓인지, 첫 갈림길에 이르는 동안 맞닥뜨린 산객은 딱 세명이 전부였습니다.
삼거리 이정표는 정상 3.2km, 무럭고개 1.6km, 한국아파트 2.9km를 가리킵니다.
한국아파트 쪽에서 대여섯 청년들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올라오더니 둘은 긴 나무의자를 전세낸 양, 발라당 드러눕습니다.
나머진 몇 발자욱 떨어져 둘러선 채 담배 연기를 뿜어 냅니다.
바닥엔 불쏘시개 낙엽이 수북한데, 참말로 어이가 없습니다.

눈총이 따가웠던지, 그들은 곧 자리를 떴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옆지기가 저만치에서 황급히 저를 불렀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이 버리고 간 꽁초의 불씨가 낙엽을 매개로, 막 살아나고 있었던 겁니다.
화들짝 놀란 옆지기가 발로 비벼 끄고 흙으로 덮었습니다.
우리마저 이곳을 벗어난 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흥분한 우리의 옆지기,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왜냐고 물었지요.
그 청년들을 따라잡아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의를 시켜야겠답니다.
오지랖 넓은 옆지기, 기어이 무리에서 쳐진 한 명을 따라잡아 “당신들이 조금 전 버린 담배꽁초가 하마트면 산불로 이어질뻔 했다’고 대차게 일갈하더군요.

다행히 고분고분 말을 알아듣기에 망정이지, ‘아줌마가 뭔데~’하면서 막 나오면 어쩔려고 그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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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삼거리에서 300m 진행하면 깊이울 계곡으로 갈라지는 두번째 삼거리가 나옵니다
정상까진 아직도 2.9km를 더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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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이나 북한산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바위건만 肉山인 왕방산에서는
이 정도 바위도 귀하게 대접 받나 봅니다.
누군가가 ‘거북바위’로 이름 붙여 존재감을 찾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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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숲길을 두 시간 남짓 걸어오르면 앞이 탁 트이면서 팔각정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팔각정자를 끼고 돌아 200여 미터를 걸음하면 왕방산 정상(737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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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없는 왕방산 정상엔 한낮의 땡볕이 독하게 내리꽂혀 산객들은 한결같이 정상석 인증샷만 날린뒤 서둘러 숲속으로 숨어 듭니다.
정상 사방은 간유리를 통해 본 풍경처럼 희뿌옇습니다.
박무인지, 미세먼지인지… 첩첩산군의 조망은 접어야겠습니다.
지근거리의 국사봉만 겨우 분간이 될 뿐입니다.



날 선선해지면 다시 걸음해 국사봉 능선길을 걸을 요량으로 주변 산세를 머릿속에 새기고서, 올랐던 길 되돌아 무럭고개로 내려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