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단어이니까
막는 도구는 마개, 덮는 도구는 덮개, 까는 도구는 깔개
여미는 도구는 여미개
여미개는 옷 중에서도 특히 윗도리의 두 옷깃을 여밀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다
이 여미개에는 옷의 특성이나 디자인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제일 흔한 단추, 마이깡이라고 부르는 후크, 지퍼, 찍찍이라고 부르는 벨크로, 똑딱이라고 부르는 스냅단추,
생할한복에 많이 쓰는 매듭단추, 한복에 많이 쓰는 옷고름, 등산장비 등에 많이 쓰는 버클, 스토퍼 등이 있다
다 옷의 종류나 특성에 따라 옷과 조화를 이루면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장치들이다
디자이너가 여러 모로 생각을 하여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미개로 달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미개들을 보면서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한다
지퍼는 군사문화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자꾸라고 불렀는데 자꾸만 보면 자꾸 획일적이고 통일적이고 강압적인 군사문화가 생각난다
여미개 중에는 가장 쉽고 간단할 것이다
처음 끼울 때에만 조심하고 그 다음에는 쭈욱 잡아당겨 주면 자꾸가 알아서 스스로 다 채워준다
아마 만들 때에는 여미개 중에서 제일 복잡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게 정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만들고 나서는 아주 쉽고 강력하고 간편하다
여미개 장치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일단 잠그고 나면 스스로 손잡이를 당겨 내리기 전에는 절대로 벌어지는 일이 없다
힘센 장정이 온힘으로 잡아당겨도 꿈쩍하지 않는다
제일 우수꽝스럽고 여리고 힘이 없고 왜 이런 것을 달았나 싶은 것이 똑딱이단추이다
요철처럼 생긴 이 똑딱이단추는 암쪽 구멍에 작은 철사를 입구 양쪽으로 달아서
수쪽 돌출부분이 이 철사를 비집고 드나들면서 여미게 되어 있다
똑딱이단추는 달 때에도 무척 손이 많이 간다
암수 한짝을 일일이 네군데씩 정교하게 꿰매주어야 한다
잠그거나 열 때 똑 딱 소리가 나서 똑딱이단추라고 부른다
일일이 하나씩 똑 똑 똑 똑 하고 소리가 나게 잠그지만
한쪽 자락을 잡고 힘을 조금만 주어 벌려도 다 다 다 닥 하면서 금세 열려버린다
애써 잠가도 누군가 열 마음만 먹으면 아주 손쉽게 눈 감고도 열 수 있는 것이 이 똑딱이단추이다
이것에 비하면 조금 튼튼하고 단단하면서도 또한 맥없이 열리는 것이 단추이다
여미개 중에서 가장 많이 쓰는 이 단추는 일일이 하나하나 잠그고 풀어주어야 한다
단추갯수가 많은 것은 열 몇개씩이나 되는 단추를 하나씩 잠그고 풀어야 한다
단추를 잠그고 푸는 손동작 또한 상당히 정교해야 한다
나나이찌라고 불리우는 단추구멍 또한 요즘은 미싱으로 만들지만
일일이 하나씩 감춤질을 해서 만들어야 한다
단추도 구멍에 따라 일일이 바느질로 꿰매주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쓰거나 만들 때 손이 많이 가는 여미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추여미개는 손으로 우악스럽게 확 잡아당기면 모두 풀리거나 옷감이 찢어지게 된다
단추는 그 크기나 색상이나 디자인이 수천가지이다
여미는 작업과 함께 외적 디자인이 가장 돋보이는 여미개가 단추일 듯 싶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이 찍찍이라고 부르는 벨크로이다
테이프 한면에는 작은 갈고리를 무수히 만들고 다른 한면에는 걸림고리를 수없이 만들어서
테이프를 붙일 때 갈고리가 걸림고리에 걸려서 옷깃이 여며지게 만든 것이 벨크로이다
아마 여미개 중에서 가장 나중에 개발되었을 것이다
근데 이 벨크로는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붙일 때에는 아무 소리없이 잘 붙는다
그러나 뗄 때에는 갈고리 하나하나가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떨어지느라고
찌익 하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찍찍이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벨크로는 열고 잠그기가 아주 쉽다
그냥 척 갖다 대면 저절로 붙는다
그리고 그냥 손으로 잡아떼면 찌익 소리는 나지만 또한 잘 떨어진다
참 간편하다 여미개 중에 가장 손쉬울 것이다
몇개의 여미개를 살펴보면서 나는 이상한 방향으로 궁리를 한다
똑딱이 단추 찍찍이 자꾸, 이 네가지 여미개는 사람 사는 길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람마다 개성에 따라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지퍼 같은 사람, 단추 같은 사람, 벨크로 같은 사람, 스냅단추 같은 사람
내 마음은 똑딱이단추로 여미고 싶다
누구라도 필요한 사람 있으면 손쉽게 열고 들어올 수 있다
굳이 내 마음이 필요하다는데 움켜쥐고 안 내주려고 앙탈을 부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필요한 사람은 늘 손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이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열어보이며
나를 필요로 하는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
사랑은 단추처럼 하고 싶다
하나하나 일일이 손길이 가야 한다
단추 그 하나에도 모양과 색깔과 디자인과 크기가 다르듯이
모든 사람에게 다 다른 사랑을 아름답게 꾸며서 대접하고 싶다
큰 단추 화려한 단추 아기자기한 단추 갯수가 많은 단추
때로는 누구에게는 단추구멍을 아주 헐겁게 하고 누구에게는 조금 단추구멍을 꽉끼게 만들고 싶다
하나하나 잠그거나 풀면서 눈빛을 보고 숨결을 느끼며 향기를 맡을 것이다
욕망은 자크처럼 굳세게 채울 것이다
이제 이 나이에 이 세상에 이 현실에서
단맛 향기 패기 진정이 다 사라진 욕망을 더 이상 들추어내서 무엇에 쓰리오
낡고 모지라지고 스러지고 사그라지고 쪼그라진 영혼과 육신을 가지고
무슨 욕망을 자랑스럽게 휘두를 것이리오
꼬깃꼬깃 접고 꾸깃꾸깃 꾸겨넣고 어금니만한 큰 이빨로 만들어진 대형자크로 꽉 채워버릴 것이다
장정 서너명이 달려들어 잡아당겨도 꿈적도 하지 않을 그런 자크로 말이다
아 ! 그러나 나는 잘 안다
나는 또 도리없이 벨크로로 살아야 한다
본성이니 천성이니 또 누구 잘못이니 그런 거를 따지기도 전에
이미 나는 또 벨크로 같은 인연을 살아야 한다
붙일 땐 언젠가는 떼기 위해 붙이는 것
만나고 헤어지는 회자정리는 인간의 기본과정인데
벨크로처럼 나는 떨어질 때 가슴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벨크로 떨어질 때의 비명을
나는 질러야 한다
이젠 나도 소리없이 떨어지고 싶다
더 이상 눈물이나 비명이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