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수배돼 피신 중 쓸쓸히 생 마감…직계가족도 몰살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전 재산을 바친 이석영 선생의 첫 장례식이 경기 남양주시에서 열린다.
이석영 선생은 87년 전 중국에서 순국했으나 직계 후손이 없어 그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됐으나 도시개발로 유해도 사라졌다.
남양주시는 16일 화도읍에서 영석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을 연다고 9일 밝혔다.
선생을 기리고 정신을 청소년들에게 알리고자 최근 문을 연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에서 진행된다.
영석 이석영 선생 추모식 추진위원회가 공동 개최한다.
이종찬 추진위원장은 "이석영 선생은 직계 후손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잊혔다"며 "87년 만에 추모식이 아닌 장례식을 치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석영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형제들과 결의해 1910년 12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면서 화도읍 일대 땅을 모두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등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당시 땅을 판 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석영 선생은 양부이자 조선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 대감에게 재산을 상속받았다.
매천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는 '경기도 양주(현재 남양주)에서 한양까지 80리 언저리 논과 밭이 모두 이유원의 땅'이라고 기술됐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해방될 때까지 광복군의 주축이면서 청산리 대첩 등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1918년 일제의 지명수배로 이석영 선생은 선양, 베이징, 텐진, 상하이 등으로 피신, 빈곤하게 생활했다.
그의 가족들은 1927년 일제에 몰살당했다.
이석영 선생은 1934년 2월 16일 상하이에서 80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당시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피신 중이어서 임시로 장례를 치렀으나 일제의 공격으로 전란이 격화한데다 직계 후손조차 없어 묘지를 살피지 못했다.
이후 공동묘지 일대가 개발돼 이석영 선생의 유해를 찾을 수 없다.
이석영 선생은 형제인 우당 이회영 선생,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등과 달리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91년에서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네 번째 등급인 '애국장'에 추서됐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순이다.
지난해에는 정부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경기도에는 조선 시대 '금수저' 사대부들이 모두 살았지만, 국가가 기울어질 때 나서는 이는 드물었다"며 "전 재산과 목숨을 항일운동에 바친 이석영 선생 여섯 형제는 경기도의 자랑이자 남양주의 자랑"이라고 추모했다.
첫 추모식이자 장례식에는 유족과 문 전 국회의장, 이 위원장을 비롯해 조광한 남양주시장, 이철영 남양주시의장, 황후연 경기북부보훈지청장, 이종걸 전 국회의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고자 간소하게 진행되며 남양주시 인터넷 방송인 유튜브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을 통해 중계하고 유튜브 '우당TV'에도 탑재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