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 형태로 25년째 유지…"양반집으로 보기 어렵다" 민원
강화군, 고증 거쳐 복원 오류 확인되면 전면 재복원 검토
인천 강화도에 있는 조선시대 문인 이건창 선생의 생가가 엉터리로 복원됐다는 민원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강화군은 고증을 거쳐 민원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면 전면 재복원도 검토할 방침이다.

13일 강화군 등에 따르면 화도면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 문인(文人)으로 감찰사 등을 지낸 이건창 선생의 생가는 1996년 1차 복원(안채 공사) 뒤 1998년 2차 복원(문간채 공사)이 이뤄져 현재까지 25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집은 자연석 담장으로 둘린 초성 'ㄱ'자 형태의 단층 초가집으로 주춧돌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운 뒤 연결하는 구조로 지어졌다.

애초 이 집은 강화도가 행정구역상 경기도였던 1994년 10월 경기도기념물 제149호로 지정됐다가 인천시 편입 후 1995년 3월 인천시기념물 제30호로 변경 지정됐다.

이 선생의 후손들은 이 집에 거주하다가 이주하면서 강화군에 토지와 집을 팔았고 강화군에 집을 옛 모습으로 복원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화군은 해당 요청에 따라 복원한 뒤 현재까지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집이 엉터리로 복원됐다는 민원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 선생은 조부가 조선시대 이조판서를, 부친이 증이조참판을 역임한데다 본인도 주요 관직을 지낸 양반이었는데 '초가집'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민원인 A씨는 "이건창 선생은 양반 계층이었으며 풍문에 따르면 생가 뒤편에 기와 조각이 많이 널려있었다고 한다"며 "이런 점으로 추측해볼 때 이 선생 생가는 초가집이 아니라 기와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의구심을 나타냈다.

인천시가 2016년 진행한 '이건창 생가 정밀실측조사 보고서'에도 이와 같은 추정이 제기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이건창 조부 이시원은 이조판서를 지낸 후 고향 생가에 돌아와 살다가 죽었고, 이건창 역시 고위 관직을 지낸 후 후 고향 집에 돌아와 살았기 때문에 당시 가옥 형태는 초가삼간에 가까운 현재와는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이건창 가족들이 구한말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난 후 일제강점기 때 살았던 후손들이 쇠퇴하면서 가옥의 규모와 격이 현재 모습을 가지게 된 배경도 있다'며 초가집 행태로 남은 이유도 추정했다.

강화군은 복원 공사가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진행됐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승인 과정에서 고증이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오래전 일이어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강화군 관계자는 "이건창 생가의 애초 모습에 대한 자료가 없는 상황이어서 현재로서는 복원이 제대로 이뤄진 것인지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다"며 "조만간 5천만원을 투입해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고증을 진행해 옛 모습과 상당 부분 다른 것으로 조사되면 전면 재복원하는 방안도 검토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건창 선생(1852∼1898년)은 강화도 출신으로 조선시대 후기 충청우도(현 충청도 서부 지역) 암행어사와 해주감찰사 등을 지내며 관리들의 비위를 단속하고 백성들의 구휼에 힘쓴 위인이자 문인이다.

주요 저서인 '당의통략'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과 과정을 기술한 명서로 평가받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