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간 70만 명 사상자 내고 1차 대전 향방 갈라

제1차 세계대전의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꼽힌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무려 70만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전투를 먼저 시작한 독일군의 목표는 프랑스군을 '말려 죽이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를 완전히 소모시킨 뒤 서부전선을 돌파해 전쟁을 끝장낸다는 것. 그 결정적 장소로 선택된 곳이 바로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 도시 베르됭이었다.

대포를 비롯한 물자와 병력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인 독일의 승리가 예상됐다.

하지만 10개월 뒤 독일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베르됭에서 물러나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이 바뀐 전환점도 바로 이 베르됭 전투였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의 대기록 '베르됭 전투'
영국의 역사학자 앨리스터 혼이 쓴 역사서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이 돼버린 베르됭 전투를 통해 1차 세계대전을 고찰한다.

저자는 병사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지휘관들의 회고록, 신문과 잡지 기사,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 자료는 물론이고 생존한 참전 군인들의 증언까지 두루 반영해 1916년의 베르됭을 되살려낸다.

1915년 말,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1차 세계대전의 승기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점령키로 결심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수차례 베르됭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는데, 특히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다 독일에 함락된 이곳은 프랑스로선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1916년 2월 21일, 드디어 독일군은 '심판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공격에 나선다.

몇 시간 동안 폭우처럼 쏟아진 독일군의 포탄 세례에 프랑스의 철로는 모두 망가졌고, 숲도 거대한 화염 덩어리로 전락했다.

프랑스군은 상부의 지휘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밀려드는 독일군과 맞서야 했다.

베르됭 전투는 참혹한 소모전의 전형이었다.

연합군은 '총알받이'가 될 병사의 수로 볼 때 연합군이 우세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양쪽이 한 사람씩 병력을 잃는다면 결국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기계적으로 단순 계산했다.

동맹군도 같은 맞대응 전략이었다.

결국 이 전투는 단위 면적당 사망자가 역사상 가장 많은 참극으로 기록됐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독일군 참모총장의 전략은 '말려 죽이기'였고, 프랑스군 총사령관의 신조는 '죽을 때까지 공격하기'였다.

결국 독일군과 프랑스군 모두 무수한 죽음을 양산했고, 베르됭은 무너진 건물, 박살난 무기, 어지럽게 널린 유골 등 지옥처럼 참혹한 '쓰레기 더미'가 돼버렸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 베르됭은 영광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에 사로잡혀 양국은 전술적 후퇴를 생각지도 못했다.

최종적으로 독일이 베르됭에서 병력을 빼기는 했지만 입은 손실은 두 나라가 거의 비슷했다.

프랑스에는 신성한 상징이 됐으나 내적으로 군대의 정신이 체념으로 물들었고, 독일군은 끔찍한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때 다시 베르됭으로 돌진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나는 베르됭의 불운한 구릉지를 처음 방문하고 느낀 감정을 결코 떨치지 못했다"며 "그곳에서 싸운 두 나라 병사들의 경이로운 용기에 감탄했고, 그 낭비와 더없는 어리석음에 소름이 끼쳤다"고 말한다.

가루가 되도록 난타당한 황무지에는 감춰지고 반쯤 잊힌 유물, 우리가 아직도 '대전(the Great War)'이라고 부르는 전쟁의 요체인 어리석음과 자부심, 영웅주의에 바쳐진 유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본은 1962년에 처음 출간됐으며, 완역본이 국내에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행복 옮김. 교양인. 584쪽. 2만8천원.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의 대기록 '베르됭 전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