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그잭트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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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업체들의 빅딜과 함께 ‘액체생검’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독보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기존에 충족되지 못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기업들에게는 향후 더 큰 기회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액체생검, 화제의 중심에 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두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던 미국 바이오기업 테라노스의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즈는 4년 뒤인 2018년 캘리포니아 연방 검찰로부터 금융사기 및 공모 혐의로 기소됐다.

손끝에서 채취한 미량의 혈액으로 200여종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했던 테라노스의 기업가치는 한때 90억 달러(약 10조 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진단 가능 질환 수와 정확도가 크게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액체생검(liquid biopsy)의 개념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였지만 아름다운 순간은 아니었다.

액체생검은 말 그대로 혈액, 척수액, 분변 등의 체액(體液)을 이용해 질병을 진단하는 방식이다. 테라노스가 열광적 반응을 얻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기존 진단방식에서 환자들이 느끼는 불편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암환자의 경우 유전자 변이에 따라 어떤 항암제를 처방받을지 진단이 필요한데, 현재 표준적인 진단법은 조직생검(tissue biopsy) 방식이다. 조직생검이란 액체생검과 달리 내시경이나 주사바늘 등으로 환자의 몸에서 침습적인 방식으로 조직 일부를 추출해 분석을 수행하는 검진법을 뜻한다. 하지만 침습적인 채취 방식에는 고통이 따른다. 드물지만 조직 채취 과정에서 일어나는 출혈, 손상, 기흉 등의 부작용으로 증세가 악화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조직생검이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니다. 뼈나 뇌에 발발한 암처럼 조직 채취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암 환자의 40% 정도는 조직생검이 어려운 케이스이고, 분석에 실패하는 비율도 30~40%에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현재 방식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미충족수요(unmet needs)가 클수록 액체생검은 필연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글로벌 빅딜이 주는 시사점

액체생검 시장에서 글로벌 업체들의 빅딜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27일, 미국 대장암 진단기업 이그젝트사이언스가 액체생검 기반 암 진단 기업인 트리브를 21억5000만 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트리브는 혈액 속 DNA와 단백질을 분석해 10여 종의 암을 조기 진단하는 제품인 캔서식(CancerSEEK)을 보유한 기업이다.

불과 1개월 전인 지난 9월엔 진단기기 제조업체인 일루미나가 액체생검 업체인 그레일을 무려 8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제프 베조스, 빌 게이츠 등 투자자들의 면면이 화려한 것으로도 유명한 그레일은 본래 2016년 일루미나의 사업부가 스핀오프(spin-off)해 분사된 기업이다. 일루미나는 자신이 독립시킨 기업을 4년 후 재인수한 셈이다.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시장에서 두 빅딜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첫째, 자신의 강점을 활용하면서 기존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완하기 위한 결정이라는 점이다. 이그젝트사이언스는 액체생검 기반 대장암 조기진단의 선도적 기업으로, 2019년 지노믹헬스를 인수하면서 유방암, 전립선암의 예후진단 사업을 추가한 데 이어 이번 트리브 인수로 조기진단에서도 대장암 외 다른 암종으로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장비의 글로벌 1위 기업인 일루미나는 가던트 인수를 통해 NGS 기반 암 진단사업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둘째, 대상분야의 유사성이다. 인수대상 두 기업의 대표 제품인 트리브의 캔서식(CancerSEEK)과 그레일의 갤러리(Galleri) 모두 혈액을 기반으로, 초기 단계의 암을 조기에 진단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또한 두 제품 모두 하나의 암종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암을 동시에 진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암 정복을 목표하는 액체생검 기술

암 조기진단은 현재 방식의 한계가 뚜렷하고 미충족수요가 큰 대표적 분야이다. 보건복지부에 의하면 기대수명까지 생존할 경우 남성은 38%, 여성은 33%의 확률로 암에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조기 발견의 실패는 암의 치료를 어렵게 하고 있다. 대장암을 예로 들면, 초기에 발견 시 생존율은 90%에 달하지만 진단 시기가 늦을수록 3기 발견 시 40%, 4기 발견 시 10%로 급격히 떨어진다. 치료 비용도 후기로 갈수록 치솟는다. 그럼에도 현재 대장암 환자의 절반 이상은 3~4기가 돼서야 확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대장암만큼이나 유병률이 높은 폐암의 경우 폐 안에 감각 신경이 없는 특성 때문에 조기 진단율이 20%에 불과하다.

한 번의 검사로 여러 암을 진단할 수 있는 다중암진단(multi-cancer diagnostics)도 액체생검의 오래된 목표이다. 암 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DNA 조각(ctDNA; circulating tumor DNA)들은 혈액을 타고 떠다니게 되는데, ctDNA를 PCR 혹은 NGS 방식으로 증폭시켜 암세포의 존재 여부와 종류를 판단할 수 있다. 병원에서 뽑은 피로 혈액 내의 암 DNA를 검출할 수가 있다면 진단의 편의성과 조기발견 확률이 획기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조직생검이 어려운 암이라면 그 필요성은 더욱 크다. 암 정복이라는 최종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치료제뿐 아니라 진단영역의 기술이 함께 발전해야 하며, 이는 많은 액체생검 업체들이 암 분야에 집중하고 있는 배경이다. 이그젝트사이언스는 다중암 조기진단의 잠재적인 시장 규모가 250억 달러(약 27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 되기 위해선 해결돼야 할 과제들도 존재한다. 환자를 정확하게 환자로 구별해내는 비율을 민감도라고 하는데, 혈중 ctDNA는 초기일수록 아주 작은 양이기 때문에 높은 민감도를 얻기가 쉽지 않다. 트리브의 캔서식은 표준치료와 병행 시에 52.1%의 암 진단 민감도를 얻었으며(캔서식 단독 사용시 민감도 27.1%), 가던트의 갤러리는 1~3기 암에서 44%의 민감도를 기록했다.

마땅한 조기진단 방법이 없는 암들도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수치이지만 보다 더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민감도가 개선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 다중 DNA 분석의 비용 자체가 높은 만큼 얼마나 검진자가 부담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에 출시가 가능할지도 중요한 과제이다.

미충족 수요를 해결하는 기업이 각광받을 것

국내에서도 많은 액체생검 기업들이 암 진단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변화하는 시장 속에서 다른 제품보다 우수한 성능을 기록하는 기업과 기존 방식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다양한 미충족수요를 공략하는 기업들이 앞으로도 높은 가치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지노믹트리는 대장내시경의 불편함으로 대장암 발견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대변에서 DNA의 메틸화(methylation) 여부를 감지해 90%의 민감도로 대장암을 진단하는 키트를 출시했다. 젠큐릭스는 유방암의 발병 특성이 인종별로 다르다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 아시아 환자 대상으로 유효성을 검증한 유방암 재발 위험 검사제품을 개발했다

혈중 종양세포를 손상 없이 분리하는 플랫폼 기술을 보유한 싸이토젠과 액체생검에 쓰이는 PNA(펩타이드 기반 인공 DNA)를 생산 가능한 파나진처럼 밸류체인 위에서의 수요를 창출한 사례도 있다.

시장조사기관 파마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체외진단(IVD) 분야에서 19건의 인수합병(M&A)이 일어났으며 평균 인수 규모는 21억 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간 제약 분야(577건)와 바이오 분야(156건)의 M&A 건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했지만 최근 연이은 빅딜 소식은 글로벌 진단 업체들이 성장하는 시장과 새로운 기술에 목말라 있음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시장 재편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국내 진단업체들의 선전이 지속돼 한국에서도 세계 시장이 주목하는 글로벌 라이센싱 및 인수합병이 성사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정준영

서울대 농경제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2018년 삼성증권에서 애널리스트 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삼성증권에서 의료기기 및 헬스케어 애널리스트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12월호에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