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과거에 세습됐던 엘리트 계층을 재능과 야망만 가진 외부인들에게 개방함으로써 평등과 기회를 촉진하는 약속을 내건다.
또한, 부와 지위가 성취를 통해 확보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혜택과 공익이 조화를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능력으로 '미국 예일대 법대 교수'가 된 엘리트인 대니얼 마코비츠는 저서 '엘리트 세습'(세종서적)에서 능력주의는 더는 이런 약속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며 "실력대로 공정하다는 능력주의는 속임수"라고 일갈한다.
지난해 미국에서 'The Meritocracy Trap'(능력주의의 덫)이란 원제로 출간된 이 책은 미국 사회에 능력주의 논쟁을 촉발한 바 있다.
마코비츠 교수는 오늘날 중산층 어린이는 학교에서 부유층 어린이에게 뒤처지고, 중산층 성인은 직장에서 명문대 졸업자에게 밀려나는 등 중산층에겐 기회가 차단된다고 지적한다.
특히 모두가 규칙대로 해도 부유층만 승리하는 경쟁인데도, 소득과 지위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지적한다.
'부모 찬스'가 없는 중산층 자녀들보다 '능력의 대물림'으로 성과를 거둔 엘리트들이 근면성이란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진다는 설명이다.
엘리트들은 물리적 자산을 상속하기보다 인적 자본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으로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이는 중산층 이하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격차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재학생 가운데 소득 상위 1%인 가구 출신이 하위 50% 가구 출신보다 더 많다.
한국의 이른바 명문대에서도 비슷한 실정이다.
저자는 능력주의는 엘리트에게도 해롭다고 설명한다.
엘리트 성인들은 뼈 빠지도록 치열하게 일하며 이제까지의 투자에서 수익을 뽑아내기 위해 자신들이 받은 교육을 최대한 활용한다.
과거의 귀족과 달리 불안하고 정통성이 없는 엘리트를 무자비하고 평생 지속되는 경쟁으로 끌어들이며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소득과 지위를 얻으라고 부추긴다는 것이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엘리트와 중산층을 갈라놓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중산층은 기득권에 원한을 품고, 엘리트는 특권 계층의 부정한 특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계층이 공유해야 하는 사회는 쌍방 비난, 무배려, 기능 장애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먼저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을 시대순으로 기록하고, 능력주의가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러 실증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미국 노동시장이 갈수록 특별한 교육과 값비싼 훈련을 받은 인력을 우대하는 추세로 변하면서 일류 대학 학위가 없는 중산층은 노동시장 전반에서 차별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은행 주택담보대출 업무의 경우 중산층 출신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사례 등으로 설명한다.
금융기술의 고도화로 주택담보대출 파생상품이 발달하면서 은행은 새로운 유동화 증권을 설계하고 거래할 초고도 숙련자의 취업 기회를 늘리고, 중간 숙련도급인 대출 담당자의 기회는 줄였다.
복잡해진 금융상품이 제공하는 공익은 분명치 않지만, 중산층 수백 명의 몫을 소수 엘리트가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능력주의는 명문대, MBA(경영학 석사), 로스쿨, 월가, 실리콘밸리 등을 엘리트끼리 야망을 겨루는 격전지로 만들고 시민 대다수는 주변부로 몰아낸다.
따라서 저자는 능력주의를 "소득과 부의 최대 원천이 토지가 아닌 노동력인 세상을 위해 맞춤 제작된 귀족제도"라고 정의한다.
이런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는 개혁의 방향으로 저자는 교육과 직업 두 경로를 제안한다.
현재 부유층 자녀의 최고급 교육에 집중하는 교육방식은 개방되고 포용성을 가져야 한다며 최고 명문 학교와 대학에서라도 입시 경쟁이 완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엘리트 근로 계층에 집중된 생산이 중산층 출신인 중간 숙련도급 근로자에게 골고루 분산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정아 옮김. 504쪽. 2만2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