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존중 사상 담은 보물…500년간 원형 그대로 보존
충남 서산시 운산면과 해미면을 잇는 619번, 647번 지방도에는 천년의 시간이 흐른다.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 보원사 터, 청벚꽃 피는 개심사, 조선 명종대왕태실, 해미읍성 등 백제, 고려, 조선의 귀한 문화유산이 이 길 따라 펼쳐져 있다.

한 지역의 문화재가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조선왕조 태실은 생명존중 사상을 담았다.

특히 명종태실은 미술사적 가치가 뛰어나고 보존 상태도 좋아 보물로 지정됐다.

태실 중에서는 유일한 보물이다.

조선 13대 명종대왕(재위 1545∼1567) 태실과 비는 2018년 3월 조선 태실 유적 중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됐다.

경상북도 성주군 한개마을에 전국 최대 규모의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지만, 사적으로 지정돼 있을 뿐이다.

태실은 조선왕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봉안한 뒤 조성한 시설을 말한다.

태를 보관한 작은 돌방이다.

조선은 태를 아기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아기의 처음을 소중히 여겼다.

태실 문화에서 생명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감염병 사태가 길어지면서 더 중요해진 생명존중이다.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것처럼 소중히 한다면 방역 방해나 저항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명종 태실이 보물로 지정된 것은 약 500년 전 처음 지어진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았고, 원형대로 잘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명종 태실과 비석은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서산나들목에서 빠져 647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 있다.

우리가 명종 태실을 찾은 날은 오랜 비가 그치고 한반도를 내습한 큰 태풍들 사이에 잠깐 하늘이 맑았던 날이었다.

하늘은 드높고 대기는 '바삭' 소리라도 낼 듯 습기가 가신 아침.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새파란 언덕 초지에 하얀 해오라기 십여 마리가 무심한 듯 느릿느릿 배회하고 있었다.

'서산에는 해오라기가 많은가 보다'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려본다.

태실로 오르는 언덕길은 잘 정비되지는 않았지만, 잡초를 짧게 깎아 놓아 발걸음이 자못 상쾌했다.

주차장에서 15분쯤 올랐을까.

김종필 전 총리가 썼다는 명종대왕태실 표지석이 나왔다.

일대에 해오라기가 많은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태실은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사업소인 서산한우목장 가까이 있었다.

해오라기는 쇠똥에 서식하는 벌레를 좋아한다.

길 오른쪽 절벽 아래에 목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건강하고 잘생긴 누렁소 200∼300마리가 풀을 뜯거나 한가로이 드러누워 있었다.

수백 마리 해오라기들이 소들 위로 떼 지어 날기를 반복했다.

축사에 갇히지 않고 너른 들을 노니는 토박이 소들을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달래는 듯, 으르는 듯한 목부들의 몰이 소리에 소들이 줄줄이 줄을 지어 옆 방목지로 옮겨갔다.

한우 유전자원을 보존, 개량하는 이 사업소가 키우는 소는 약 2천500마리다.

하나같이 건강하고, 잘 생기고, 훌륭한 족보를 가졌다.

그 때문에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몸값 비싼 소가 수두룩하다고 한다.

마침내 명종 태실과 비에 다다랐다.

산이라고 하기엔 작은, 태봉산 정상 한가운데 태실이 있었다.

태실 주변 난간석 바깥에 비가 3개 건립돼 있다.

태실 위는 맑고 푸른 하늘, 아래는 서산 시내다.

태봉산에서 바라보니 서산은 크고 작은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었다.

산들이 만든 원의 중심에 태실이 있는 것 같다.

이른바 '명당'이다.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종의 동생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수렴청정했던 어머니 문정왕후 사후 선정을 펴려 노력했다.

태실은 받침돌, 태를 넣은 둥근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3기의 비는 태실이 건립됐던 1538년, 명종 즉위 이듬해인 1546년, 숙종 때인 1711년에 각각 제작됐다.

1546년 세워진 주상전하태실비의 글씨가 오랜 세월에 훼손되자 숙종 때 다시 제작됐다.

일제는 명종의 태를 넣은 태항아리를 1928년 고양 서삼릉으로 옮겼다.

이 항아리는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됐고,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조선 왕조 태실의 상당수는 다른 자리로 옮겨졌거나 변형됐다.

관련 기록도 유실된 경우가 많다.

반면 명종 태실은 건립 후 482년 동안 처음 지어진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실록에 관련 기록도 상세히 남아 있다.

학계는 명종 태실이 한국 미술사의 태실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본다.

명종 태실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태봉산은 해발 100m 정도로, 큰 언덕에 가깝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데도 일제가 태항아리를 빼내 옮긴 것 외에, 태실 자체는 훼손되지 않았다.

별다른 보호 장치 없이 500년 세월을 견딘 게 놀랍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