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맥주, 황열병, 광견병,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현명한 신 크바시르, 좀비. 이들을 하나로 묶는 연관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침'이다.
찌르는 침이 아니라 99% 이상의 물에 전해질, 아밀라아제와 같은 소화효소, 면역물질, 소량의 상피세포 등이 포함된 입속의 액체 말이다.
'침방울'이 무엇보다 큰 공포의 대상이 돼 버린 시기에 현직 의사가 의학은 물론 역사와 신화, 전설, 민담 등 여러 방향에서 침을 분석한 책을 펴냈다.
응급의학 전문의인 저자는 이미 응급실 주변의 풍경 등을 담은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와 '의사가 뭐라고'를 비롯한 여러 권의 책에서 만만찮은 글발을 과시한 바 있다.
제목이 '침 튀기는 인문학'이지만 역시 저자의 전공이 의학이다 보니 의학과 과학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저자에 따르면 pH 6.3~6.9의 약산성인 침은 5개의 큰 침샘과 100개 이상의 작은 침샘에서 하루에 1.5ℓ가량 만들어진다.
매우 많은 양처럼 느껴지지만, 침이 수행하는 다양한 기능과 입안이 항상 촉촉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생각하면 결코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침은 더럽다고 느끼고 침을 뱉는 행위는 종종 비위생적이고 매너 없는 짓 또는 모욕을 안기는 일로 받아들이지만, 역사나 문학에 비친 침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잘게 찢은 빵과 물이 든 통 속에 침을 뱉어 넣는 방법으로 맥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침에 포함된 아밀라아제와 일부 미생물이 발효를 촉진하는 것은 물론 독특한 향까지 만들어낸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물론 침에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같은 맥주 제조법을 되살릴 필요는 없다.
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황열병,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이 모기의 침을 통해 옮긴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다.
광견병 역시 보균한 짐승에 물려서 감염되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된 감염원은 개다.
광견병은 예전에는 발병하면 100%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기도 했지만, 개나 인간이나 할 것 없이 걸리기만 하면 핏발 선 눈에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이 이 병의 끔찍한 이미지를 강화했을 것이다.
침이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북유럽 신화의 크바시르가 그 경우 가운데 하나다.
편을 갈라 큰 전쟁을 벌이던 신들이 문득 그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뒤 화해를 하게 되고 이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신들이 커다란 무쇠솥에 침을 뱉고 밤새워 먹고 마시며 즐기다 자리가 파해 다들 돌아가려고 할 무렵 신들의 리더인 오딘은 무쇠솥을 바라보며 "우리의 소중한 침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너무 아쉽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름다운 여신 프레이야가 무쇠솥에 손을 넣어 휘저었고 솥에서 신과 동일한 형체가 걸어 나왔다.
오딘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혜롭지만 자신과는 달리 의심하지 않는 이 신참에게 크바시르라는 이름을 붙인다.
드라큘라와 좀비의 비교에서는 저자의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진다.
각각 공포영화의 장르를 구축한 두 괴물의 이미지는 대조된다.
드라큘라가 '사악하지만 이성적이며 아름다운' 존재라면 좀비는 '두렵고 끔찍하지만 사악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이미지다.
이런 차이는 드라큘라를 대표하는 '피'와 좀비를 상징하는 '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피는 아주 매혹적인 측면이 있지만 침은 아무래도 더럽고 징그러운 느낌이다.
침도 인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생명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만한 차별은 수긍이 된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가장 위험한 침은 독사의 침일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도 상상력을 발휘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코브라에 물려 죽었다는 설에는 의문이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코브라의 독으로 자살한 것만은 사실로 보이며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독사의 독은 '코브라 형'과 '살무사 형'이 있는데 코브라과의 독사는 독니가 짧아 상대의 근육 깊이 독을 주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의 성분도 신경독과 근육에 손상을 주는 물질이다.
따라서 코브라에 물리면 사망 원인은 독가스를 흡입했을 때와 같은 호흡근 마비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살무삿과의 독사는 근육 깊숙이 긴 독니를 주입할 수 있어서 독의 성분도 주로 괴사와 혈액 응고를 일으키는 물질이다.
살무삿과의 독사에 물리면 상처 부위가 부어오르고 피부 조직이 괴사해 시커멓게 되며 혈액 응고 장애와 장기 출혈로 피를 잔뜩 흘리는 끔찍한 모습이 된다.
죽어서도 여왕다운 품위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었던 클레오파트라가 이런 차이를 알았다면 어느 쪽을 택했을지는 불문가지다.
침에 관해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은 놀랍다.
생태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추천사에서 쓴 것처럼 이 책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처음 나온 침에 관한 인문학 책'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침에는 지금 우리를 압도하는 '비말 공포'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아현. 262쪽. 1만5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