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제도 신부 "한국에 6개월만 있으려 했는데 60년 지나"(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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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파견 60주년' 맞아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출간 간담회
"서로 관심 갖고 이해하고 뭉쳤으면…죽으면 청주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올해로 한국 파견 60주년을 맞은 함제도(87·미국명 제라드 해먼드) 신부에게 한국은 마음의 고향이다.
그는 196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행 배에 올랐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 한국에 있었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6개월 있다가 돌아가야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6년을 지나 이제 60년이라는 시간이 됐다.
청주교구 사목활동에 30년,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에 나머지 30년을 보낸 사이 20대 젊은 신부는 80대 노령의 신부가 됐다.
경기 파주 참회와속죄의 성당에서 13일 한국 파견 6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는 함 신부를 12일 서울 대방동성당 정규하관에서 만났다.
그의 60년 선교 여정을 담은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출간을 기념해 마련된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간담회 동안 그는 지난 60년 한국 생활을 차분하게 돌아보며 말 사이사이로는 농담으로 웃음을 줬다.
"(처음 한국을 왔을 때) 답답한 마음이 있었어요.
당시 배로 왔는데, 끝까지 사제생활, 선교사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죠. 지금도 옛날 사진을 보면 웃지 않고 있어요.
처음에는 답답해서 말도 못 하고, 지금은 웃는 얘기지만, 6개월 있다가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이제 60년이 지났습니다.
"
함 신부는 청주교구에서 본당 신부로 사목활동을 했다.
그 당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사제로서 어려운 이들을 많이 도우려고 했으나 뜻한 만큼 잘 안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해결된 일도 없었다.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인듯했다.
"처음에 청주에 내려왔을 때 어렵게 사는 걸 보고서 도와주지도 못하고 해결 못 한 일이 많았어요.
제일 어려웠던 것은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장례식에 가면 남편을 잃고서 애들 셋 데리고서 묘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였죠. 부인은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그 시대에는 도와주지도 못했어요.
"
◇ 1998년부터 북한 결핵 환자 지원…함흥·원산 등 60여차례 방북
청주교구에서 보낸 지난 30년은 그의 사제생활 절반의 기억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북한을 60여차례 방문하면서 결핵 환자 지원사업에 나선 것이다.
그는 1998년부터 가톨릭 구호단체인 유진벨 재단과 함께 결핵 환자 지원사업에 뛰어들었는데, 북한에서 결핵 환자를 찾아 최북단 함흥은 물론 원산 등 여러 도시를 직접 방문했다고 전했다.
그만큼 그에게 평양교구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평양교구에 늘 관심을 갖고 있어요.
북한은 우리 민족입니다.
선교사는 가장 빈곤한 곳을 찾아야 하죠. 불쌍한 사람들 곁에는 항상 예수님이 계십니다.
"
함 신부는 북한을 오가며 북쪽 사람들과 만나는 동안 강조했던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한반도, 이 땅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남과 북, 민족의 화해다.
마지막으로는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다.
그는 "이 세 가지를 지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서 "핵 문제는 그 이후에 나중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절친' 故 장익 주교와 에피소드 전하며 눈시울…"형제처럼 살았죠"
함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는 고(故) 장익 주교다.
둘은 1951년 미국의 메리놀 소신학교(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 만나 70년 우정을 이어왔다.
그가 한국을 첫 선교지로 택한 것도 장 주교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둘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도 관심이 많았다.
공통점이 많았던 사제이자 친구였던 셈이다.
지난 5일 노환으로 장 주교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더는 볼 수 없지만, 가슴 속에는 친구와 함께했던 70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했다.
함 신부는 장 주교 선종 전에 집을 찾아가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함께 나눴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둘은 1933년생 동갑내기다.
친구를 넘어 형제처럼 지냈는데, 실은 함 신부가 장 주교보다 형이라는 것이다.
장 주교는 1933년 11월생이고, 자신은 같은 해 8월생이라 3개월이나 앞선다는 것.
"그때 (장 주교와) 헤어지기 전에 '형님'이라고 한번 불러보시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장 주교가 '형님'하고 불렀어요.
나는 '오냐'라고 했죠(웃음). 둘이 형제처럼 살아왔습니다.
장이 나를 '제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요.
돌아가실 때 몇 번 울었어요.
"
그는 웃으면서 시작한 얘기 끝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 "'코로나 19'로 미국 가족 못 만나…죽으면 청주교구 성직자 묘역에"
과거 함 신부처럼 메리놀회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신부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현재 7명만이 메리놀회 소속으로 한국에 머물고 있다.
함 신부는 올해로 아흔살인 방인이 로베르토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나이가 많다.
선교사 수가 줄어들며 지난 3월에는 서울 광진구에 있던 메리놀회 사무실을 정리하고서 대방동성당 정규하관으로 옮겨왔다.
남쪽에 있는 선교회 사무실을 북쪽에도 여는 소망을 가져온 그에게 사무실 이사는 가슴 아픈 부분이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가 장기화하며 사제 서품 60주년이자 한국 파견 60주년을 미국에 있는 가족과 함께 기념하지 못한 것도 크게 아쉬워했다.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인 함 신부는 테레사와 안나, 두 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서로 오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함 신부는 60년을 지낸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선교 활동을 시작한 청주교구 성직자 묘역이 그가 염두에 둔 곳이다.
"10년 전 50주년 행사 때 청주교구에 묏자리를 하나 달라고 부탁해뒀어요.
그런데 하나 더 부탁하고 싶네요.
내가 뚱뚱하니까.
묏자리 두 개를 준비해달라고 새로 부탁해야겠어요.
(웃음)"
함 신부에게 60년을 같이 지내온 한국인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는지 묻자 '서로에 대한 관심'이라는 말을 했다.
"서로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이해심으로 뭉쳤으면 합니다.
북한을 생각하면서 민족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면 해요.
옛날처럼 형제처럼 사랑했으면 합니다.
"
그는 요즘 외방 선교회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본당에서 고해성사도 주관하고 있다면서 북한에 갈 준비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자들과 헤어지는 인사말로 "다음에 만날 때는 소주 한 병 가져오세요.
"라며 환하게 웃었다.
/연합뉴스
"서로 관심 갖고 이해하고 뭉쳤으면…죽으면 청주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올해로 한국 파견 60주년을 맞은 함제도(87·미국명 제라드 해먼드) 신부에게 한국은 마음의 고향이다.
그는 196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행 배에 올랐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 한국에 있었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6개월 있다가 돌아가야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6년을 지나 이제 60년이라는 시간이 됐다.
청주교구 사목활동에 30년,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에 나머지 30년을 보낸 사이 20대 젊은 신부는 80대 노령의 신부가 됐다.
경기 파주 참회와속죄의 성당에서 13일 한국 파견 6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는 함 신부를 12일 서울 대방동성당 정규하관에서 만났다.
그의 60년 선교 여정을 담은 회고록 '선교사의 여행' 출간을 기념해 마련된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간담회 동안 그는 지난 60년 한국 생활을 차분하게 돌아보며 말 사이사이로는 농담으로 웃음을 줬다.
"(처음 한국을 왔을 때) 답답한 마음이 있었어요.
당시 배로 왔는데, 끝까지 사제생활, 선교사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죠. 지금도 옛날 사진을 보면 웃지 않고 있어요.
처음에는 답답해서 말도 못 하고, 지금은 웃는 얘기지만, 6개월 있다가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이제 60년이 지났습니다.
"
함 신부는 청주교구에서 본당 신부로 사목활동을 했다.
그 당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사제로서 어려운 이들을 많이 도우려고 했으나 뜻한 만큼 잘 안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해결된 일도 없었다.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인듯했다.
"처음에 청주에 내려왔을 때 어렵게 사는 걸 보고서 도와주지도 못하고 해결 못 한 일이 많았어요.
제일 어려웠던 것은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장례식에 가면 남편을 잃고서 애들 셋 데리고서 묘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였죠. 부인은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그 시대에는 도와주지도 못했어요.
"
◇ 1998년부터 북한 결핵 환자 지원…함흥·원산 등 60여차례 방북
청주교구에서 보낸 지난 30년은 그의 사제생활 절반의 기억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북한을 60여차례 방문하면서 결핵 환자 지원사업에 나선 것이다.
그는 1998년부터 가톨릭 구호단체인 유진벨 재단과 함께 결핵 환자 지원사업에 뛰어들었는데, 북한에서 결핵 환자를 찾아 최북단 함흥은 물론 원산 등 여러 도시를 직접 방문했다고 전했다.
그만큼 그에게 평양교구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평양교구에 늘 관심을 갖고 있어요.
북한은 우리 민족입니다.
선교사는 가장 빈곤한 곳을 찾아야 하죠. 불쌍한 사람들 곁에는 항상 예수님이 계십니다.
"
함 신부는 북한을 오가며 북쪽 사람들과 만나는 동안 강조했던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한반도, 이 땅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남과 북, 민족의 화해다.
마지막으로는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다.
그는 "이 세 가지를 지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서 "핵 문제는 그 이후에 나중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절친' 故 장익 주교와 에피소드 전하며 눈시울…"형제처럼 살았죠"
함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는 고(故) 장익 주교다.
둘은 1951년 미국의 메리놀 소신학교(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 만나 70년 우정을 이어왔다.
그가 한국을 첫 선교지로 택한 것도 장 주교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둘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도 관심이 많았다.
공통점이 많았던 사제이자 친구였던 셈이다.
지난 5일 노환으로 장 주교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더는 볼 수 없지만, 가슴 속에는 친구와 함께했던 70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했다.
함 신부는 장 주교 선종 전에 집을 찾아가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함께 나눴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둘은 1933년생 동갑내기다.
친구를 넘어 형제처럼 지냈는데, 실은 함 신부가 장 주교보다 형이라는 것이다.
장 주교는 1933년 11월생이고, 자신은 같은 해 8월생이라 3개월이나 앞선다는 것.
"그때 (장 주교와) 헤어지기 전에 '형님'이라고 한번 불러보시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장 주교가 '형님'하고 불렀어요.
나는 '오냐'라고 했죠(웃음). 둘이 형제처럼 살아왔습니다.
장이 나를 '제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요.
돌아가실 때 몇 번 울었어요.
"
그는 웃으면서 시작한 얘기 끝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 "'코로나 19'로 미국 가족 못 만나…죽으면 청주교구 성직자 묘역에"
과거 함 신부처럼 메리놀회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신부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현재 7명만이 메리놀회 소속으로 한국에 머물고 있다.
함 신부는 올해로 아흔살인 방인이 로베르토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나이가 많다.
선교사 수가 줄어들며 지난 3월에는 서울 광진구에 있던 메리놀회 사무실을 정리하고서 대방동성당 정규하관으로 옮겨왔다.
남쪽에 있는 선교회 사무실을 북쪽에도 여는 소망을 가져온 그에게 사무실 이사는 가슴 아픈 부분이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가 장기화하며 사제 서품 60주년이자 한국 파견 60주년을 미국에 있는 가족과 함께 기념하지 못한 것도 크게 아쉬워했다.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인 함 신부는 테레사와 안나, 두 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서로 오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함 신부는 60년을 지낸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선교 활동을 시작한 청주교구 성직자 묘역이 그가 염두에 둔 곳이다.
"10년 전 50주년 행사 때 청주교구에 묏자리를 하나 달라고 부탁해뒀어요.
그런데 하나 더 부탁하고 싶네요.
내가 뚱뚱하니까.
묏자리 두 개를 준비해달라고 새로 부탁해야겠어요.
(웃음)"
함 신부에게 60년을 같이 지내온 한국인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는지 묻자 '서로에 대한 관심'이라는 말을 했다.
"서로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이해심으로 뭉쳤으면 합니다.
북한을 생각하면서 민족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면 해요.
옛날처럼 형제처럼 사랑했으면 합니다.
"
그는 요즘 외방 선교회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본당에서 고해성사도 주관하고 있다면서 북한에 갈 준비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자들과 헤어지는 인사말로 "다음에 만날 때는 소주 한 병 가져오세요.
"라며 환하게 웃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