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홍상수·장률 감독도 흑백영화…"인물 감정 세밀하게 관찰"
알록달록한 색상을 걷어내니 희극과 비극은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지난달 29일 개봉한 '기생충' 흑백판 이야기다.

고전과 클래식 영화를 동경해온 봉준호 감독이 홍경표 촬영감독과 함께 특별히 선보인 버전이다.

화려한 색과 소소한 디테일이 어둠에 묻힌 대신 인물 표정과 대사, 이야기가 오롯이 살아났다.

특히 배우들 눈빛에서 더 많은 감정과 사연이 읽혔다.

박사장네 2층 창문에서 정원 생일파티를 바라보던 기우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이지만 동경과 부러움, 암울한 현실에 대한 야속함이 차례로 교차했다.

인디언 분장을 한 채 박사장과 신경전을 벌이는 기택의 눈빛에선 살기가, 기택에게서 나는 냄새를 못마땅해하는 박사장 표정에선 '선을 넘는 경멸'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흑백 명암은 가난과 부유함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거실 한 면을 메운 유리창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박사장네와 어두컴컴한 기택네 반지하 방, 그리고 문광의 남편이 숨어사는 지하실의 명도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야기와 대사, 표정에 집중하다 보니 희극 끝에 찾아온 비극은 더욱 처연하고 황망하게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현실의 생생함이 색과 함께 휘발되면서 한바탕 꿈을꾼 듯한 기분도 들게도 한다.

컬러 영화 시대지만 감독들은 종종 흑백영화를 선보인다.

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이준익 감독 '자산어보'도 흑백으로 촬영됐다.

흑산도로 유배당한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설경구 분)이 섬 청년 창대(변요한)를 만나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며 조선 최초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자산어보가 탄생한 흑산도 바다 풍경 등을 흑백의 수묵화처럼 담아냈다.

이 감독은 영화 '동주'(2016)도 흑백으로 찍었다.

비용 절감 차원도 있지만, 윤동주 시인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인 흑백사진 속 윤동주를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2월 개봉한 '항거: 유관순 이야기'(조민호 감독)도 흑백으로 만들었다.

시대의 차가운 공기와 그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을 지닌 유관순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돼 큰 울림을 준다.

흑백 영상은 끔찍한 고문 현장을 필터로 한번 걸러내는 역할도 했다.

홍상수 감독 역시 흑백영화를 자주 찍는다.

'강변호텔'(2019), '풀잎들'(2018), '그후'(2017), '북촌방향'(2011), '오! 수정'(2000) 등이 흑백영화다.

홍 감독은 과거 흑백영화를 찍는 이유에 대해 "흑과 백으로 단순화된 화면은 관객이 주위 사물이나 환경에 방해받지 않고 인물들에게 집중할 수 있어 인물의 감정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장률 감독은 '춘몽'(2016)을 흑백으로 선보였다.

'봄에 꾸는 꿈'이라는 제목 그대로 꿈속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의도였다.

이 작품은 그해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