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상당수는 에너지를 단기에 폭발시키고 사그라진다.
반면에 평생 초심을 잃지 않고 수행하듯 갈고닦는 작가도 있다.
끝없이 변화하고 실험하는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원숙한 경지로 나아간다.
작품세계 여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생애 후반부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며 명작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뜨겁게 활동하던 청춘기를 보내고 무르익은 거장들의 작품은 그래서 또 다른 의미와 가치가 있다.
종로구 삼청동 PKKM갤러리에서 개막한 윤형근(1928~2007) 회고전은 한국 추상화 거목으로 꼽히는 작가의 1989년부터 1999년 사이 작업을 선보인다.
국내에서 열리는 윤형근 작품전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회고전 이후 약 2년 만이다.
당시 전시가 '천지문(天地門)' 작업을 비롯한 작가의 평생 화업을 두루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60대에 접어든 이후 선보인 대작 중심의 원숙한 작품 세계가 조명된다.
윤형근은 하늘을 뜻하는 청색과 땅을 뜻하는 암갈색을 섞어 먹빛에 가까운 오묘한 검정빛을 만든다.
리넨, 캔버스, 한지에 큰 붓으로 물감을 찍어내리기를 반복한다.
화면에는 수묵화 번짐처럼 물감이 배어들고 검은 기둥이 선다.
지난해 베네치아비엔날레 기간 베네치아 포르투니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서 평단과 언론은 이러한 작업에 경이로움을 표하며 호평을 쏟아냈다.
이번 전시에 나온 20여점은 작가 사후 처음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초기작과 비교해 더 구조적이고 대담한 형태로 진화했다.
먹빛은 더 짙어지고 검은 기둥은 더 크고 각지고 단단해져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지난 몇 년간 단색화 연구를 많이 하면서 초기 작업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 작업뿐만 아니라 1990년대 작업도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어 "작가가 추구하는 미학의 원숙한 세계를 보여주는 작업들로, 비로소 동서양 구분을 넘나드는 진정한 한국적인 현대성을 화폭에 꽃피웠다"라고 덧붙였다.
전시에는 작가에게 큰 영향을 준 두 거장 작품이 한 점씩 나왔다.
추사 김정희 글씨와 미국 작가 도널드 저드 판화다.
윤형근은 자신의 그림은 추사의 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밝혔고, 1991년 미니멀리즘 대가 저드와 만난 이후 더욱 극단적인 단순함을 추구했다.
갤러리는 이번 전시를 위해 온라인 뷰잉룸도 개설했다.
전시는 6월 20일까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