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격차 정면 돌파한 게 폭발력…오스카 캠페인, 게릴라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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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4관왕 '기생충'
봉준호 감독 기자회견
현실 최대한 솔직하게 그린 게
다소 위험해보일 순 있어도
영화가 택할 유일한 길로 생각
봉준호 감독 기자회견
현실 최대한 솔직하게 그린 게
다소 위험해보일 순 있어도
영화가 택할 유일한 길로 생각
“‘기생충’이 세계적인 조명을 받은 이유라면 동시대 이웃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인 데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앙상블을 이뤘기 때문일 겁니다. 공상과학(SF) 요소가 많은 ‘괴물’이나 ‘설국열차’와는 달리 현실에 기반한 영화여서 더 폭발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제92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19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귀국 후 첫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회견에는 봉 감독과 함께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박명훈 등 배우들과 제작자인 곽신애 바른손E&A 대표, 한진원 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감독 등이 참석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데도 한국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뭐냐는 CNN 기자의 질문에 “자주 들었던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제 영화는 우스꽝스럽고 코미디적인 면이 있지만 빈부격차의 현대사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씁쓸하고 쓰라린 면도 있습니다. 그걸 1㎝라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부분을 정면 돌파했습니다. 관객이 불편하고 싫어할까 봐 영화에 당의정을 입혀서 달콤한 장식으로 이끌어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최대한 솔직하게 그리려고 했던 게 대중적인 측면에서 위험해 보일 순 있어도 이 영화가 택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봉 감독은 험난했던 오스카 캠페인에 대해 “마치 게릴라전을 치르는 것 같았다”며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CJ와 바른손, 배우들이 좋은 팀워크로 물량의 열세를 커버하면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캠페인 당시 거대 스튜디오나 넷플릭스 등에 비하면 예산이 훨씬 적었어요. 경쟁작들은 로스앤젤레스(LA) 시내에 광고판이 있고, 신문에 전면광고가 나왔죠. 하지만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 네온은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중소 배급사였어요. 저와 강호 선배님이 코피를 흘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뛸 수밖에 없었죠. 인터뷰만 600차례 이상, 관객과의 대화도 100회 이상 했습니다.”
봉 감독은 “노아 바움백과 토드 필립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바쁜 창작자인데 왜 일선에서 벗어나서 시간을 들여 캠페인을 하는지, 스튜디오는 왜 많은 예산을 쓰는지, 낯설고 이상하게 보인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래도 이런 식으로 작품들을 밀도 있게 검증하는구나,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점검해보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봉 감독이 캠페인의 일환으로 했던 한 인터뷰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로컬’이라고 말한 게 아카데미를 도발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었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제가 처음 캠페인을 하는 와중에 무슨 도발씩이나 하겠습니까. 국제 영화제와 아카데미를 비교하다가 한 이야기인데 미국의 젊은 분들이 SNS에 많이 올린 것 같습니다.”
봉 감독이 시상식에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을 언급해 화제가 된 수상 소감의 후일담도 소개했다. “오늘 아침에 스코세이지 감독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저로서는 영광이죠. 마지막에 ‘그동안 고생했을 테니 쉬어라. 다만 조금만 쉬어라. 나도 그렇고 다들 차기작을 기다리니까 조금만 쉬고 다시 일하라’고 하셨어요.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차기작 두 편에 대해서는 “몇 년 전부터 준비하던 것이고 기생충과는 관련 없다”고만 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을 미국 HBO방송사와 드라마로 제작하는 것과 관련해 “‘기생충’이 애초 가진 주제의식과 동시대 빈부격차에 대한 이야기를 블랙코미디와 범죄 드라마 형식으로 더 깊게 파고들어 갈 것”이라며 “HBO의 ‘체르노빌’처럼 5~6편으로 밀도가 높은 TV시리즈를 만들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틸다 스윈턴, 마크 러펄로가 캐스팅됐다는 보도는 부인했다. “저와 ‘빅쇼트’를 연출한 애덤 매케이 감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방향과 구조에 대한 논의를 이제 시작하는 단계예요. 오는 5월 ‘설국열차’가 미국에서 TV시리즈로 방영되는데, 제작에 들어가 5년이 걸린 것을 보면 ‘기생충’도 꽤 시간이 걸릴 겁니다.”
봉 감독은 ‘기생충’ 흑백판을 내놓은 데 대해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이나 연기 디테일, 뉘앙스를 훨씬 더 많이 느낄 수 있다”며 “알록달록한 컬러가 사라지니까 배우들의 표정과 눈빛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 수상 이후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신의 동상이나 생가 복원 작업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그런 이야기는 제가 죽은 후에 해주셨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생각하면서 그런 기사들을 넘겼다”며 웃었다.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에 대해서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밝혔다. “한국 영화산업이 20여 년간 눈부신 발전이 있었지만 제가 데뷔할 때보다 젊은 감독들이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에는 점점 어려워졌어요. 1980~1990년대 큰 붐을 이뤘던 홍콩 영화산업이 어떻게 쇠퇴했는지 우리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길을 걷지 않으려면 한국의 제작·투자자들이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도전적인 영화들을 산업이 수용해야 합니다. 최근 독립영화를 짚어보면 워낙 많은 재능이 이곳저곳에서 꽃피고 있어 산업과 좋은 충돌이 일어날 거라고 봅니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
제92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19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귀국 후 첫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회견에는 봉 감독과 함께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박명훈 등 배우들과 제작자인 곽신애 바른손E&A 대표, 한진원 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감독 등이 참석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데도 한국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뭐냐는 CNN 기자의 질문에 “자주 들었던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제 영화는 우스꽝스럽고 코미디적인 면이 있지만 빈부격차의 현대사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씁쓸하고 쓰라린 면도 있습니다. 그걸 1㎝라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부분을 정면 돌파했습니다. 관객이 불편하고 싫어할까 봐 영화에 당의정을 입혀서 달콤한 장식으로 이끌어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최대한 솔직하게 그리려고 했던 게 대중적인 측면에서 위험해 보일 순 있어도 이 영화가 택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봉 감독은 험난했던 오스카 캠페인에 대해 “마치 게릴라전을 치르는 것 같았다”며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CJ와 바른손, 배우들이 좋은 팀워크로 물량의 열세를 커버하면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캠페인 당시 거대 스튜디오나 넷플릭스 등에 비하면 예산이 훨씬 적었어요. 경쟁작들은 로스앤젤레스(LA) 시내에 광고판이 있고, 신문에 전면광고가 나왔죠. 하지만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 네온은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중소 배급사였어요. 저와 강호 선배님이 코피를 흘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뛸 수밖에 없었죠. 인터뷰만 600차례 이상, 관객과의 대화도 100회 이상 했습니다.”
봉 감독은 “노아 바움백과 토드 필립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바쁜 창작자인데 왜 일선에서 벗어나서 시간을 들여 캠페인을 하는지, 스튜디오는 왜 많은 예산을 쓰는지, 낯설고 이상하게 보인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래도 이런 식으로 작품들을 밀도 있게 검증하는구나,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점검해보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봉 감독이 캠페인의 일환으로 했던 한 인터뷰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로컬’이라고 말한 게 아카데미를 도발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었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제가 처음 캠페인을 하는 와중에 무슨 도발씩이나 하겠습니까. 국제 영화제와 아카데미를 비교하다가 한 이야기인데 미국의 젊은 분들이 SNS에 많이 올린 것 같습니다.”
봉 감독이 시상식에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을 언급해 화제가 된 수상 소감의 후일담도 소개했다. “오늘 아침에 스코세이지 감독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저로서는 영광이죠. 마지막에 ‘그동안 고생했을 테니 쉬어라. 다만 조금만 쉬어라. 나도 그렇고 다들 차기작을 기다리니까 조금만 쉬고 다시 일하라’고 하셨어요.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차기작 두 편에 대해서는 “몇 년 전부터 준비하던 것이고 기생충과는 관련 없다”고만 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을 미국 HBO방송사와 드라마로 제작하는 것과 관련해 “‘기생충’이 애초 가진 주제의식과 동시대 빈부격차에 대한 이야기를 블랙코미디와 범죄 드라마 형식으로 더 깊게 파고들어 갈 것”이라며 “HBO의 ‘체르노빌’처럼 5~6편으로 밀도가 높은 TV시리즈를 만들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틸다 스윈턴, 마크 러펄로가 캐스팅됐다는 보도는 부인했다. “저와 ‘빅쇼트’를 연출한 애덤 매케이 감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방향과 구조에 대한 논의를 이제 시작하는 단계예요. 오는 5월 ‘설국열차’가 미국에서 TV시리즈로 방영되는데, 제작에 들어가 5년이 걸린 것을 보면 ‘기생충’도 꽤 시간이 걸릴 겁니다.”
봉 감독은 ‘기생충’ 흑백판을 내놓은 데 대해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이나 연기 디테일, 뉘앙스를 훨씬 더 많이 느낄 수 있다”며 “알록달록한 컬러가 사라지니까 배우들의 표정과 눈빛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 수상 이후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신의 동상이나 생가 복원 작업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그런 이야기는 제가 죽은 후에 해주셨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생각하면서 그런 기사들을 넘겼다”며 웃었다.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에 대해서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밝혔다. “한국 영화산업이 20여 년간 눈부신 발전이 있었지만 제가 데뷔할 때보다 젊은 감독들이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에는 점점 어려워졌어요. 1980~1990년대 큰 붐을 이뤘던 홍콩 영화산업이 어떻게 쇠퇴했는지 우리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길을 걷지 않으려면 한국의 제작·투자자들이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도전적인 영화들을 산업이 수용해야 합니다. 최근 독립영화를 짚어보면 워낙 많은 재능이 이곳저곳에서 꽃피고 있어 산업과 좋은 충돌이 일어날 거라고 봅니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