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27분.
지난해 11월 10일 그리스에서 열린 아테네 마라톤 대회에서 나온 기록이다.
평범한 성적이지만 마라톤계에서는 의미가 깊다.
세계 최초로 시각장애인이 가이드의 도움 없이 홀로 풀코스를 완주하며 받아든 결실이기 때문이다.
기록의 주인공인 한동호(33)씨는 4일 연합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훈련할 때는 3시간대에도 진입했지만 아쉽지는 않다"며 "건강하게 완주했고 그걸로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발걸음으로 시각장애인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한씨는 20대 시작과 동시에 시각장애 판정을 받았다.
상지대에 갓 입학한 2006년, 조금씩 눈앞 사물이 뿌예지는 것을 느꼈다.
불안해 병원을 찾았더니 '레베르시신경병증'이라는 희소병 판정을 내렸다.
치료법이 없고 앞으로 서서히 시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우울함이 몰려왔다.
'다 끝났다'는 무력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력은 0.03"이라며 "렌즈에 김이 서리고 스크래치가 난 안경을 쓴 것과 비슷하게 보이는 상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황에서 벗어난 계기는 '달리기'였다.
땀을 흘릴수록 단단해지는 몸은 자신감을 불러왔다.
한씨는 "무작정 헬스장의 러닝머신에서 하루에 8시간씩 뛰었다"며 "이전까지는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시각 장애 판정을 받고 난 후 웨이트 트레이닝과 달리기 등 닥치는 대로 운동을 했던 것 같다.
그제야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피어났다"고 전했다.
달리기하면서 체력이 생기자 수영과 스키에도 도전했다.
수영과 사이클, 달리기를 쉬지 않고 도전해 강한 체력이 요구되는 철인 3종 경기에도 출전했다.
2014 장애인 아시안게임에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수영 국가대표로 출전해 100m 접영에서 은메달, 50m 자유형에서는 동메달 등을 따냈다.
내친김에 마라톤에도 도전장을 던졌다.
한씨는 "러닝머신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뛰는 게 아니라 도심 곳곳을 수백명의 선수들과 함께 몇시간씩 뛴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으로서 어려운 점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막막하던 차에 도움의 손길이 전해졌다.
한 저축은행이 위성 위치정보시스템(GPS)과 3차원 카메라 등을 바탕으로 만든 특수 안경을 제공했다.
이용자 위치와 주위 환경을 파악해 뼈 전도 이어폰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이 특수 안경으로, 한씨는 가이드 러너 없이 혼자 달릴 수 있게 됐다.
이에 지난해 4월부터 팀을 꾸려 본격적인 마라톤 준비에 들어갔고 매일 10㎞ 이상 뛰는 강훈련을 시작했다.
거리가 40㎞에 달하는 서울 천호대교와 방화대교를 횡단하는 등 풀코스 완주 연습만 10번이 넘는다.
그는 연습 기록에 못 미친 아테네 마라톤 대회 결과에 대해 "기록을 세우려고 달린 게 아니고, 완주 자체가 목표였다"며 "완주하고 나서 선수들끼리 부둥켜안고 다독이면서 '마라톤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강조했다.
한씨의 새해 목표는 장애인이라는 단어에 남아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바꾸는 것이다.
한씨는 "장애인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핸디캡드'(handicapped·장애가 있는)도 있지만 '챌린지드'(challenged·도전을 받은)라는 단어도 있다"며 "지금은 시각장애인이 마라톤을 한다는 사실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나중에는 장애인의 도전을 특별하게 바라보지 않는 사회 분위기로 바뀌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