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에 통화정책 '약발' 사라져
물가는 안오르고 소비·투자 축소
적지 않은 사람이 지금이 미국 역사상 가장 긴 경기팽창 국면이라고 믿고 있다. 주가가 많이 올랐으니 그리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경기가 좋아진 적은 없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마지막 회의에서 양적완화를 재개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2020년까지 미국 중앙은행(Fed)과 ECB에서만 6000억달러 이상의 추가 유동성이 공급될 전망이다. 이런 행동은 경기가 좋은 시점에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돈을 풀었는데도 10년째 경기가 호전되지 않는 이유는 금리가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돈을 무한대로 찍어내면서 화폐의 보유 가치인 금리가 계속 하락했다. 여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은퇴자 소비가 크게 감소했다. 예를 들어 60세 은퇴자가 3억원을 은퇴자금으로 모았다고 치자. 채권금리가 연 10%인 시대에 살았다면 연간 3000만원의 수입을 안전하게 올릴 수 있다.
제로(0)금리 시대엔 아예 이자를 받을 수 없다. 이자가 적어지면 각종 연기금에 대한 보장도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은퇴자 처지를 생각할 때 그렇다고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도 없다. 차선은 덜 쓰는 것이다.
그나마 소비할 돈이라도 있다면 좋다. 은퇴 즉시 극빈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젊은이들이 은퇴자를 부양해야 한다. 기성세대도 소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소비는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나라의 경제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미국은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71%가 개인 소비로부터 나온다. 소비가 감소하면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 소비재 인기가 하락해 물가는 더욱 떨어진다.
기업도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아무리 금리를 낮춰도 증설하거나 설비투자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중앙은행은 경기 침체로 더욱 금리를 낮추지만 돈을 가져다 쓰는 이들이 없으니 이 돈이 시중에 풀리지 못하고 중앙은행으로 재유입된다.
중앙은행이 수년 동안 돈을 그렇게나 많이 찍었지만 금리만 낮췄을 뿐 경기 부양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렇다면 경기가 좋지 않은데 주가가 상승하는 이유는 뭘까. 기업 실적이 좋아서가 아니다. 리서치업체 팩트셋에 따르면 미국 S&P500 기업 이익은 4분기에 1.5%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실화되면 4분기 연속으로 미국 기업 이익이 감소하게 된다.
이익은 감소하는데 주가가 올라 지난 수십 년 동안 S&P500의 주가수익비율(PER: 주가/주당순이익)이 지금처럼 높았던 적은 단 두 차례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가매출비율(PSR: 주가/주당매출)은 7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주가는 실적을 좇는다’고 믿는 펀더멘털리스트들로선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다. 양적완화 이후 신경제에서는 PER, PSR 등 기존의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수준) 지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은 금리 때문에 발생한다. 금리가 제로로 수렴하면 주식의 실질 가치는 이론적으로 무한대가 된다. 배당성장 할인 모형에 따르면 주식의 적정가치는 차기 배당을 ‘요구 수익률-성장률’로 나눠 구한다. 시장의 요구 수익률(금리)이 제로를 향해 가니 적정가치는 무한대로 향한다.
기업이 투자할 곳이 없어 이익을 재투자하지 않고 주로 자사주 매입에 쓰는 것도 문제다. 결국 모든 수수께끼를 만든 원흉은 금리인 셈이다. 금리가 제로로 수렴하면서 소비 감소→투자 축소 →경기 침체 가속화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됐다. 2008년 이후 단 한 차례의 경기 호황이 없었음에도 채권과 주식이 동시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독특한 세상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