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 추억이다.
여행을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낯선 땅 현지인의 삶 속에 끼어들어 부딪히고, 생활해 보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다.
문득문득 생각나 그리워지기도 하고, 친구 등 주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랑거리로 소환되는 '여행의 추억'은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여행 기간이 짧다면 현지의 다양한 레저프로그램을 체험하는 것도 여행의 기억을 추억으로 저장할 좋은 기회다.
여기 220여 가지의 액티비티가 살아 숨 쉬는 곳이 있다.
남반구 뉴질랜드 남섬 끝자락에 있는 퀸스타운이 바로 그곳이다.
◇ 액티비티의 도시 퀸스타운
해발 2천343m의 리마커블산과 카와라우강, 와카티푸호수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퀸스타운은 '여왕이 살아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남섬의 휴양·관광도시다.
이 도시의 모든 액티비티를 경험하려면 5개월을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2만8천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아담한 호반의 도시인 이곳을 매년 관광객을 포함해 300만명 이상이 찾아온다고 한다.
퀸스타운에서의 모험은 착륙하는 비행기에서부터 시작됐다.
퀸스타운 공항은 세계에서 착륙이 가장 어려운 활주로를 가진 공항 중 하나다.
비행기는 그에 걸맞게 바람에 기우뚱거리며 협곡 사이를 가로질러 조심스럽게 내려앉는다.
'어서 와∼ 퀸스타운은 처음이지?' 퀸스타운에 도착한 다음 날 도시에서 약 46㎞ 떨어진 마을 글래노키의 다트강 방문자 센터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 바로 옆에 펼쳐진 거대한 호수가 눈을 즐겁게 한다.
서울 면적 절반 크기로, 빙하가 만든 와카티푸 호수다.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햇빛과 구름, 바람의 상태에 따라 에메랄드, 밀키블루, 구름이 투영된 잿빛 등 다양한 물색을 띤다고 한다.
마오리족은 그런 호수 밑바닥에 그들의 전설 속 거인 괴물 '마타우'가 잠자고 있다고 믿었다.
차로 약 45분을 달리는 글래노키 가는 길은 호수를 둘러싼 세실 피크(1,974m)와 월터 피크(1,815m), 토마슨 산맥 등 높은 산들과 동행하는 드라이브 길이어서 더 낭만적이다.
글래노키에 가까워지면서 호수 위 두 개의 작은 섬이 시야에 들어온다.
가는 방향으로 앞의 섬을 돼지 섬, 그 뒤를 비둘기 섬이라고 부른다.
돼지 섬은 이곳 고등학생들의 극기훈련 야영장이라고 한다.
◇ 제트보트로 즐기는 다트 강
다트강 방문자 센터에서 방수 재킷과 구명조끼를 챙겨 입은 뒤 셔틀버스를 타고 호숫가 보트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제트보트를 운전하는 에단 클락(29)은 보트 운행 경력 4년 8개월의 베테랑이다.
검지와 중지를 하나로 모아 한 바퀴 돌리는 수신호가 보트를 360도 회전시킨다는 사인임을 알려준 클락은 호수 안에서 수신호와 함께 급작스러운 360도 턴으로 우리 모두를 긴장시켰다.
마치 강아지 훈련하듯, 그가 두 손가락을 치켜세울 때마다 우리는 앞 좌석 손잡이를 꽉 붙잡아야 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물보라는 머리와 얼굴을 사정없이 적신다.
그렇게 가볍게 몸을 푼 보트는 미끄러지듯 물살을 가로질렀다.
강둑을 따라가다 드넓게 펼쳐진 모래톱과 자갈톱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어스파이어링 국립공원을 향해 질주했다.
시속 70∼80㎞로 내달리는 보트 뒤편에서는 오토바이의 배기음보다 더 강렬한 굉음과 물보라가 뿜어져 나온다.
이렇게 1m 내외의 수심이 얕은 하천을 달릴 수 있는 건 프로펠러(터빈)가 선체 내부로 들어간 보트의 엔진 덕분이다.
선체 내부에서 프로펠러를 돌려 배 밑의 취수구(흡입구)로 빨아들인 뒤 보트 후미에서 고속으로 뿜어내는 물의 힘으로 달리기 때문에 수위가 몇십 ㎝만 되어도 보트가 나아갈 수 있다.
귀가 먹먹하지만, 속도에 몸을 맡기자 마음은 저절로 자유로워진다.
이유 없는 지그재그 운전에 탑승객들이 어깨를 좌우로 들썩이며 환호성을 터뜨린다.
굴곡진 코스를 따라 급회전할 때는 속도의 쾌감이 배가된다.
노를 저어 래프팅을 즐기는 다른 관광객과 마주치면 토끼 귀 모양으로 양손을 높이 치켜들어 손을 휘젓는다.
반가움의 인사라지만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앞서 나가는 토끼의 자부심의 표현이 아닐까.
얼굴을 때리는 칼바람에 얼얼해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서야 주위 풍경이 두 눈 안으로 들어왔다.
보트의 굉음을 멈춰 세우고 강둑 어귀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야말로 고즈넉했다.
온통 빙하를 머리에 이고 선 설산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이어지며 대지를 포근하게 감싼다.
대자연의 웅장함 그 자체다.
뉴질랜드 남섬의 마운트 어스파이어링 국립공원은 1990년 이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면적은 3천555㎢로, 공원에서 트램핑과 하이킹, 등반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다.
해발 3천33m의 높이를 자랑하는 어스파이어링산이 유명하며 그 밖에도 폴럭스산(2,542m), 브루스터산(2,519m) 등이 높은 산맥을 형성한다.
강변의 간이선착장에 내리기 전 에단의 두 손가락이 또 올라간다.
그렇게 360도 턴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광란의 질주를 마쳤다.
따뜻한 코코아 한잔으로 숨과 몸을 고루 덥힌 뒤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원시림 산책에 나섰다.
숲은 너도밤나무와 토종 사철나무들, 그리고 그 아래 셀 수 없이 다양한 토종관목과 양치식물, 이끼류가 자라고 있는, 원시림의 모습 그대로다.
가이드가 건네는 '카와카와'(Kawakawa, 페퍼 트리) 나뭇잎의 매운맛을 느끼고, 숲속 동식물의 생태계 보전을 위해 설치한 트랩과 800년이 넘은 거대한 나무의 밑동 속 텅 빈 공간을 들여다보며 걷는 30∼40분은 힐링의 시간이었다.
왜 이곳이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호빗' 시리즈, '엑스맨 탄생: 울버린' 등의 영화와 아웃도어 광고 촬영지로 손꼽히는 곳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번지점프의 성지(聖地)를 가다
공항에서 자동차로 26분 거리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상업적인 번지점프를 시작한 카와라우(Kawarau) 다리가 있다.
번지점프를 세상에 알린 '성지'와도 같은 곳이어서 점프하려는 방문자보다 구경하는 관광객들로 더 붐비는 관광코스 중 하나다.
이곳에 번지점프대를 처음 세운 사람은 괴짜 모험가 A.J. 해킷이다.
1980년대 초 우연히 들른 남태평양 바누아투 펜테코스트 섬에서 본 원주민들의 성인식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소년들이 칡뿌리와 넝쿨을 엮어 발목에 묶고 약 35m 높이의 나무 탑에서 뛰어내리는 의식이다.
해킷은 고무 끈 탄성에 대한 수학 공식을 발견하고 수천 가닥의 라텍스로 밧줄을 만드는 등 번지 시스템을 개선하는 노력 끝에 오클랜드 노스쇼어의 그린하이트 다리 위에서 직접 뛰어내린다.
1986년의 일이다.
공포와 스릴을 즐기고 담력을 시험하는 그의 이 기괴한 행동은 뉴질랜드를 벗어나서도 이어진다.
1987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110m 지점에서 뛰어내려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불법적인 행동에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지만, 홍보 효과는 돈을 주고도 못 살 만큼 컸다.
1988년 고향인 퀸스타운으로 돌아온 그는 번지점프 클럽을 결성하고 그해 11월 12일 카와라우 협곡의 현수교에 번지점프대를 만들며 사업을 시작했다.
그날 발목에 번지 끈을 묶은 28명의 점퍼는 약 43m 높이의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위해 각각 75뉴질랜드달러의 요금을 지불했다.
31년이 지난 지금은 205뉴질랜드달러(성인 기준), 우리 돈 약 15만원을 내야 뛰어내릴 수 있다.
이용 요금은 약 3배가 오른 반면 아파트 10∼11층 사이의 높이인 43m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점프대가 됐다는 건 아이러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세계인이 즐기는 레포츠로 발전하면서 더 높은 곳을 향한 사업적 욕망이 끝 간 줄 모르고 치솟았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번지점프대는 2006년 마카오 타워에 설치된 것으로, 높이가 지상 233m에 이른다.
아침이 되면 점프대 개장과 동시에 번지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카와라우 다리의 점프대로 향한다.
여성 세 명과 남성 한 명이 차례대로 도우미의 카운트에 맞춰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비명과 함께 뛰어내린다.
현수교 입구의 전망대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반 관광객들도 '우와~'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점프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즐기는 사람과 보는 사람으로 나뉜 협곡은 또 그렇게 시끌벅적해진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