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감독 "여중생 통해 삶과 집의 본질을 말하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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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감독 "내 유년 시절 일부 담겼지만, 완전한 허구 이야기"
"성수대교 붕괴 참사 녹여…선진국으로의 열망·비인간화가 불러온 참사" "아이가 집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생각했어요.
물리적 집이 아니라 마음의 집 같은 것이죠."
오는 29일 개봉하는 영화 '벌새'는 1994년을 배경으로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 분)의 일상과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소소하고 평범하지만, 벌새처럼 바쁜 날갯짓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은희의 삶은 보편적인 삶의 축소판 같다.
영화는 심부름하러 다녀온 은희가 집을 착각해 아파트 초인종을 잘못 누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황하다 제집을 찾은 은희가 엄마가 열어주는 문을 닫으며 들어갈 때 카메라는 줌아웃으로 수많은 아파트 현관문을 한 화면에 담는다.
마치 그 문을 하나씩 열고 들어가면 제2, 제3의 은희가 있을 것처럼 말이다.
최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만난 김보라(38) 감독은 오프닝 장면에 대해 "집을 못 찾는 은희를 통해 무엇을 갈구하는지, 또 엄마와 관계에서 느끼는 결핍과 불안감 등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대상, 제45회 시애틀영화제 경쟁 부문 대상, 제36회 예루살렘국제영화제 최우수 장편 데뷔작 등 유수 국제영화제에서 25관왕을 달성한 수작이다.
각종 영화제에서 감독이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느냐는 것이다.
디테일한 묘사와 깊은 통찰력 덕분이다.
아시아, 서구 관객 가릴 것 없이 "내 이야기"라며 공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사실 김 감독도 은희처럼 사교육 1번지라는 강남 대치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부모님이 떡집을 운영했다.
어머니가 "떡집 좀 그만 우려먹어라"고 핀잔을 줬을 정도로 감독의 유년 시절 일부분이 녹아있다.
"은희네처럼 실제로 가족들이 방앗간에서 함께 일했는데,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대치동이라는 동네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한 축소판이었죠. 한 동네 사는 아이들끼리 아파트 평수를 물어보거나, 브랜드를 따지고, 부모님 직업을 서로 꿰뚫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죠.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소통인데, 그 지역에선 끊임없이 비교하기 때문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었죠. 인생을 살아가는 데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짜 집은 무엇인지 말하기에는 그 동네가 적합했어요.
"
김 감독은 그러나 "작가로서 제 목소리와 감정의 결이 담겼지만, 영화 자체는 굉장히 치밀하게 조직된 허구"라고 강조했다.
주인공 은희는 학교와 집에서는 얌전하지만, 일탈도 즐기는 '날라리' 여중생이다.
왜 고등학생이 아닌 중학교 2학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그들을 '중2병'이라는 말로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느끼는 삶에 대한 두려움, 공포, 질투 그리고 사랑은 인간의 원형적인 감정으로, 어른들도 똑같이 느끼지만 세련된 방식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죠."
김 감독이 이 작품을 찍게 된 계기도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영화과) 유학 시절에 중학교 3년을 다시 다니는 꿈을 꾸면서다.
"대학원 첫 학기 때 영어도 그렇고, 새로운 문화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힘들었죠. 뿌리가 뽑혔다고 느꼈어요.
그 시기에 중학교 시절 꿈을 자주 꾼 것은 아마 연관성을 느껴서였을 거에요.
중학교 때도 뿌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뒤 꿈에서 파생한 기억을 계속 기록했죠.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는 저 자신을 빼는 작업을 계속했어요.
제가 너무 극 안에 들어가 있으면 신파가 되기 때문에 건강한 거리를 두려고 했습니다.
" 은희는 영화 속에서 무심한 엄마와 가부장적인 아빠,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 사고뭉치 언니를 비롯해 남자친구, 절친, 여자 후배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한문 선생 영지까지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 가운데 은희 엄마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떡집 일과 집안일을 함께 하느라 늘 바쁘고 지쳐있는 엄마는 은희와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밖에서 만난 은희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마치 있는 데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3남매를 키우다 보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런 엄마가 자신만의 소용돌이와 만나고, 자신을 추스르고 있다고 설정했어요.
가끔 가족 구성원을 우연히 바깥에서 만났을 때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엄마 역시 엄마라는 가면을 벗은, 자연 그대로 엄마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 극 중 여성을 대놓고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아빠와 여동생에게 못되게 굴던 오빠는 어느 한순간 울음을 터뜨린다.
그 역시 낯선 모습이다.
"누구나 무너지는 순간이 있죠. 아빠와 오빠 역시 자신들이 쌓아 올린 성이 무너질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 명의 인간을 들여다보면 무수한 결이 있는데, 그런 다양한 결들을 드러내려 했죠."
김 감독은 다양한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등장과 퇴장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 구조를 짜는데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였다고 했다.
영화는 개인을 넘어 사회로도 시선을 돌린다.
배경인 1994년은 북한 김일성이 사망하고, 기상관측 사상 최고 찜통더위가 전국을 달궜으며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극 후반에 등장해 은희에게 또 하나의 물음표를 남긴다.
"성수대교 붕괴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나라가 서구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하는 공기 속에서 발생한 참사예요.
이듬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도 마찬가지죠. 두 사건은 공동의 트라우마를 안겼고, 우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개발과 성장, 신(新)한국을 만드는 데 집착했는지 깨닫게 해줬어요.
당시 그 참사들은 어린 저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죠. 그런 물리적인 붕괴가 은희가 관계 속에서 겪는 붕괴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했죠.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국가적 열망이 개인과 가족, 사회 전체에 아주 첨예하고 밀접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 사회가 인간을 성장 도구로 바라보는 게 얼마나 만연해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
/연합뉴스
"성수대교 붕괴 참사 녹여…선진국으로의 열망·비인간화가 불러온 참사" "아이가 집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생각했어요.
물리적 집이 아니라 마음의 집 같은 것이죠."
오는 29일 개봉하는 영화 '벌새'는 1994년을 배경으로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 분)의 일상과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소소하고 평범하지만, 벌새처럼 바쁜 날갯짓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은희의 삶은 보편적인 삶의 축소판 같다.
영화는 심부름하러 다녀온 은희가 집을 착각해 아파트 초인종을 잘못 누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황하다 제집을 찾은 은희가 엄마가 열어주는 문을 닫으며 들어갈 때 카메라는 줌아웃으로 수많은 아파트 현관문을 한 화면에 담는다.
마치 그 문을 하나씩 열고 들어가면 제2, 제3의 은희가 있을 것처럼 말이다.
최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만난 김보라(38) 감독은 오프닝 장면에 대해 "집을 못 찾는 은희를 통해 무엇을 갈구하는지, 또 엄마와 관계에서 느끼는 결핍과 불안감 등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대상, 제45회 시애틀영화제 경쟁 부문 대상, 제36회 예루살렘국제영화제 최우수 장편 데뷔작 등 유수 국제영화제에서 25관왕을 달성한 수작이다.
각종 영화제에서 감독이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느냐는 것이다.
디테일한 묘사와 깊은 통찰력 덕분이다.
아시아, 서구 관객 가릴 것 없이 "내 이야기"라며 공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사실 김 감독도 은희처럼 사교육 1번지라는 강남 대치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부모님이 떡집을 운영했다.
어머니가 "떡집 좀 그만 우려먹어라"고 핀잔을 줬을 정도로 감독의 유년 시절 일부분이 녹아있다.
"은희네처럼 실제로 가족들이 방앗간에서 함께 일했는데,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대치동이라는 동네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한 축소판이었죠. 한 동네 사는 아이들끼리 아파트 평수를 물어보거나, 브랜드를 따지고, 부모님 직업을 서로 꿰뚫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죠.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소통인데, 그 지역에선 끊임없이 비교하기 때문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었죠. 인생을 살아가는 데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짜 집은 무엇인지 말하기에는 그 동네가 적합했어요.
"
김 감독은 그러나 "작가로서 제 목소리와 감정의 결이 담겼지만, 영화 자체는 굉장히 치밀하게 조직된 허구"라고 강조했다.
주인공 은희는 학교와 집에서는 얌전하지만, 일탈도 즐기는 '날라리' 여중생이다.
왜 고등학생이 아닌 중학교 2학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그들을 '중2병'이라는 말로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느끼는 삶에 대한 두려움, 공포, 질투 그리고 사랑은 인간의 원형적인 감정으로, 어른들도 똑같이 느끼지만 세련된 방식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죠."
김 감독이 이 작품을 찍게 된 계기도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영화과) 유학 시절에 중학교 3년을 다시 다니는 꿈을 꾸면서다.
"대학원 첫 학기 때 영어도 그렇고, 새로운 문화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힘들었죠. 뿌리가 뽑혔다고 느꼈어요.
그 시기에 중학교 시절 꿈을 자주 꾼 것은 아마 연관성을 느껴서였을 거에요.
중학교 때도 뿌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뒤 꿈에서 파생한 기억을 계속 기록했죠.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는 저 자신을 빼는 작업을 계속했어요.
제가 너무 극 안에 들어가 있으면 신파가 되기 때문에 건강한 거리를 두려고 했습니다.
" 은희는 영화 속에서 무심한 엄마와 가부장적인 아빠,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 사고뭉치 언니를 비롯해 남자친구, 절친, 여자 후배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한문 선생 영지까지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 가운데 은희 엄마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떡집 일과 집안일을 함께 하느라 늘 바쁘고 지쳐있는 엄마는 은희와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밖에서 만난 은희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마치 있는 데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3남매를 키우다 보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런 엄마가 자신만의 소용돌이와 만나고, 자신을 추스르고 있다고 설정했어요.
가끔 가족 구성원을 우연히 바깥에서 만났을 때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엄마 역시 엄마라는 가면을 벗은, 자연 그대로 엄마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 극 중 여성을 대놓고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아빠와 여동생에게 못되게 굴던 오빠는 어느 한순간 울음을 터뜨린다.
그 역시 낯선 모습이다.
"누구나 무너지는 순간이 있죠. 아빠와 오빠 역시 자신들이 쌓아 올린 성이 무너질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 명의 인간을 들여다보면 무수한 결이 있는데, 그런 다양한 결들을 드러내려 했죠."
김 감독은 다양한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등장과 퇴장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 구조를 짜는데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였다고 했다.
영화는 개인을 넘어 사회로도 시선을 돌린다.
배경인 1994년은 북한 김일성이 사망하고, 기상관측 사상 최고 찜통더위가 전국을 달궜으며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극 후반에 등장해 은희에게 또 하나의 물음표를 남긴다.
"성수대교 붕괴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나라가 서구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하는 공기 속에서 발생한 참사예요.
이듬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도 마찬가지죠. 두 사건은 공동의 트라우마를 안겼고, 우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개발과 성장, 신(新)한국을 만드는 데 집착했는지 깨닫게 해줬어요.
당시 그 참사들은 어린 저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죠. 그런 물리적인 붕괴가 은희가 관계 속에서 겪는 붕괴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했죠.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국가적 열망이 개인과 가족, 사회 전체에 아주 첨예하고 밀접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 사회가 인간을 성장 도구로 바라보는 게 얼마나 만연해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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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