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한 색과 선, 면으로 구성한 추상화는 사실적 묘사보다 순수 조형의 가능성을 확대하며 진화했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구체적 형상이 제거된다. 그래서 미적 인식의 대상이라기보다 관람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일종의 ‘사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헤지펀드 시타델의 창업자 켄 그리핀이 3억달러(약 3600억원)에 사들인 네덜란드 출신 미국 화가 빌렘 드 쿠닝의 1955년작 ‘인터체인지’.
헤지펀드 시타델의 창업자 켄 그리핀이 3억달러(약 3600억원)에 사들인 네덜란드 출신 미국 화가 빌렘 드 쿠닝의 1955년작 ‘인터체인지’.
19세기 인상파 거장 폴 세잔에서 발아한 추상화는 전통적인 3차원 공간의 묘사를 거부한 야수파와 입체파, 독일 표현주의를 거쳐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추상표현주의와 관념미술로 발전했다. 추상표현주의는 지난 70여 년 동안 액션페인팅, 색면, 미니멀리즘 등 다양한 형태를 쏟아내며 국제 미술시장을 이끌고 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 세계 화단에서 이런 추상화 전시가 잇달아 열리고 그림값도 뛰고 있다. 미술 전문가 사이에서는 거액 자산가와 슈퍼리치들이 추상화를 사들이며 글로벌 미술시장의 활황을 이끌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드 쿠닝·로스코·폴록·뒤뷔페…글로벌 미술시장서 추상화 '질주'
슈퍼리치들은 3~4년 전부터 유명화가의 추상화를 ‘투자 사냥감’으로 여기고 있다. 지난 6월 영국 크리스티 런던의 현대미술 경매에서는 프랑스 앵포르멜(비정형)의 거장 장 뒤뷔페의 작품 ‘세리모니’가 1054만달러(약 126억원)에 낙찰됐다. 이로써 뒤뷔페도 ‘동그라미 7개(1000만달러)’ 작가군에 합류했다. 추상화 최고가 낙찰 기록은 네덜란드 출신 미국 작가 빌렘 드 쿠닝의 1955년작 ‘인터체인지’가 보유하고 있다. 헤지펀드 시타델의 창업자 켄 그리핀이 2015년 3억달러(약 3600억원)에 사들였다. 러시아 미술품 수집가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도 미국 색면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1951년작 ‘넘버6(바이올렛, 그린&레드)’를 1억8600만달러(약 2200억원)에 구입해 주목받았다.

아트컨설팅 업체 보몬트네이던의 창업자 휴고 네이던은 2017년 런던 경매에서 바실리 칸딘스키의 1913년작 ‘하얀 선이 있는 그림’을 3300만파운드(약 480억원)에 거머쥐었다. 멕시코 금융업자 데이비드 마르티네스도 미국 액션페인팅 작가 잭슨 폴록의 작품 ‘넘버 5, 1948’을 소더비 경매에서 1억4000만달러(약 1680억원)에 낙찰받았다.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1986년작 ‘추상화 599’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4600만달러(약 552억원)에 거래돼 생존 추상화가 작품 가운데 최고가를 썼다.

중국과 한국에서도 추상화의 ‘진격’이 눈에 띈다. 지난해 홍콩 소더비 가을경매에서 중국 작가 자오우키의 대작 ‘1985년 6~10월’이 710억원, 김환기의 1968년작 점화 ‘무제’는 서울옥션 경매에서 85억원에 팔리며 두 나라 현대미술의 최고가를 세웠다.

추상미술이 세계 시장의 큰 흐름을 잡아가면서 유명 작가들의 전시회도 다채롭게 열린다. 추상표현주의 선구자인 리 크래스너의 회고전이 다음달 1일까지 런던 바비칸아트갤러리에서 펼쳐진다.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는 베르나르 프리츠와 이우환을 전격 초대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추상의 서사-폴록부터 헤레라까지’전을 기획했다. 미국 휴스턴 메닐컬렉션미술관(바넷 뉴먼), 런던 테이트 브리튼(프랭크 볼링), 이탈리아 베네치아 시립 포르투니미술관(윤형근), 밀라노 카디갤러리(하종현), 한국 국립현대미술관(박서보·곽인식)도 추상화 작가 초대전을 열거나 준비 중이다.

미술평론가 김윤섭 씨는 “추상화는 대상을 포착하는 화가의 붓질로 회화 그 자체의 묘미를 살리면서도 실재 대상을 응축해낸 관념 회화라는 점에서 보는 재미가 색다르다”며 “세계시장에서 당분간 추상화의 매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