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 송시열과 윤휴, 중용 해석 때문에 원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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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백승종 지음 / 사우
296쪽 / 1만8000원
백승종 지음 / 사우
296쪽 / 1만8000원
조선 인조 때인 1637년, 서른 살의 젊은 선비 송시열이 속리산에서 윤휴를 만났다. 윤휴는 송시열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지만 둘은 금세 서로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됐다.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학문을 토론했던 둘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약관 28세의 윤휴가 ‘중용설(中庸說)’을 지으면서였다. 윤휴는 주희의 ‘중용장구집주’를 독자적 관점에서 변형했다. 장과 절의 순서를 바꾸고 주희의 주석도 자신의 견해에 따라 바꾸거나 빼버렸다.
송시열은 경악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중용장구집주’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상징이자 누구도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일종의 ‘경전’이었다. 송시열의 거듭된 비판에도 윤휴가 고집을 꺾지 않자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윤휴의 남인과 송시열의 서인은 국가적 현안이던 북벌론을 놓고도 대립했다. ‘중용’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불화는 끝내 서로 목숨을 빼앗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사약을 받게 했고, 남인이 집권한 9년 뒤엔 송시열도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은 유학 경전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을 중심으로 조선의 정치사상과 정치·문화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15~16세기 조선의 왕과 신하, 선비들에게 중용은 성리학적 통치철학의 정수를 제공했다. 이들은 사회 변화에 따라, 당면 현안이 달라질 때마다 중용에서 새로운 답을 찾았다. 특히 선비들은 중용에서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날개를 얻었고, 임진왜란을 겪은 뒤엔 중용을 통해 예(禮)의 중요성을 재인식했다.
저자는 이처럼 중용이 각광받았던 15세기의 역사적 풍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선 태종 이방원부터 세종, 성종,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왕은 대부분 중용을 몸소 공부하면서 중시했다. 제왕학의 필수교재였다. 특히 성종은 학식이 높은 신하를 불러모아 토론하기를 즐겼고, 경전에 정통한 신진 사류를 적극 등용하면서 기득권층인 훈구파를 견제했다. 이 같은 시도는 공부하기 싫어한 연산군에 이르러 두 차례의 사화로 역풍을 맞기도 했다.
훈구파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가 정치적으로 충돌한 데는 중용을 둘러싼 해석 차이도 크게 작용했다. 조광조는 중종을 임금이자 백성의 스승인 군사(君師)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중종은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기득권층과 적당히 타협하며 안락하게 살기를 원했다. 저자는 “조광조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임금에게 쓸데없이 공을 들인 셈”이라고 평가했다.
조광조 일파의 정치적 실패로 실의에 빠진 선비들은 또다시 중용을 통해 희망을 발견했다. 중용 제23장에 담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신이 대표적이다. 하늘-나의 성품-타인의 성품-사물-하늘과 땅으로 연결, 순환되는 사상체계에서 ‘나 한 사람의 도덕성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메시지를 발견한 것이다.
군사를 지향했던 조광조의 꿈은 영조, 정조 때 실현됐다. 특히 정조는 천주교의 기세를 누르고자 성리학을 더욱 강조했고, 신하들과 중용을 공부하고 논술시험까지 치렀다. 초야에 묻힌 시골 유생을 발굴해 어전에서 중용을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토록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중용’은 어떤 책인가. 중용은 기원전 5세기에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편찬했고, 오랫동안 유교경전인 ‘예기(禮記)’의 일부로 전승됐다. 예기는 기원전 1세기 한나라의 대성이 편찬한 책이다. 그랬던 중용이 한 권의 책으로 독립한 것은 언제였을까. 조선시대 선비와 명나라 학자들은 성리학이 부흥한 송나라 때였다고 믿었다. 주희가 중용 주석서를 내고 기존의 논어, 맹자에 더해 중용과 대학을 ‘사서’, 즉 네 권의 고전으로 선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런 믿음과 달리 중용이 한 권의 책자로 독립한 것은 한나라 때부터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청나라 학자 모기령이 중용의 유래를 상세히 추적한 결과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중용설(說)’이 별도로 언급돼 있어 의심의 여지 없이 독립된 책이었다는 것. 그런데도 조선의 선비들은 성리학의 찬란한 빛에 가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그럼에도 중용은 그 가치를 폄훼하기 어려운 고전이다. 텍스트의 양은 적지만 어떤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지표를 제시했고 변주돼 왔다. 18세기 이후 유교 이외의 새로운 이념이 형성되는 데 중용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대해 “중용에 언급된,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된 경지(천인합일)가 새롭게 정의되었다”고 평했다.
21세기 한국에서 중용의 현재적 의미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 저자는 하늘과 땅, 만물과 사람은 하나로 연결된 존재라는 불가분의 도리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읽어낼 것을 제안한다. 새 시대의 중용 해석은 생명을 존중하는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한 헌장을 되새기는 작업, 즉 생태주의의 길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송시열은 경악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중용장구집주’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상징이자 누구도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일종의 ‘경전’이었다. 송시열의 거듭된 비판에도 윤휴가 고집을 꺾지 않자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윤휴의 남인과 송시열의 서인은 국가적 현안이던 북벌론을 놓고도 대립했다. ‘중용’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불화는 끝내 서로 목숨을 빼앗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사약을 받게 했고, 남인이 집권한 9년 뒤엔 송시열도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은 유학 경전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을 중심으로 조선의 정치사상과 정치·문화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15~16세기 조선의 왕과 신하, 선비들에게 중용은 성리학적 통치철학의 정수를 제공했다. 이들은 사회 변화에 따라, 당면 현안이 달라질 때마다 중용에서 새로운 답을 찾았다. 특히 선비들은 중용에서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날개를 얻었고, 임진왜란을 겪은 뒤엔 중용을 통해 예(禮)의 중요성을 재인식했다.
저자는 이처럼 중용이 각광받았던 15세기의 역사적 풍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선 태종 이방원부터 세종, 성종,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왕은 대부분 중용을 몸소 공부하면서 중시했다. 제왕학의 필수교재였다. 특히 성종은 학식이 높은 신하를 불러모아 토론하기를 즐겼고, 경전에 정통한 신진 사류를 적극 등용하면서 기득권층인 훈구파를 견제했다. 이 같은 시도는 공부하기 싫어한 연산군에 이르러 두 차례의 사화로 역풍을 맞기도 했다.
훈구파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가 정치적으로 충돌한 데는 중용을 둘러싼 해석 차이도 크게 작용했다. 조광조는 중종을 임금이자 백성의 스승인 군사(君師)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중종은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기득권층과 적당히 타협하며 안락하게 살기를 원했다. 저자는 “조광조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임금에게 쓸데없이 공을 들인 셈”이라고 평가했다.
조광조 일파의 정치적 실패로 실의에 빠진 선비들은 또다시 중용을 통해 희망을 발견했다. 중용 제23장에 담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신이 대표적이다. 하늘-나의 성품-타인의 성품-사물-하늘과 땅으로 연결, 순환되는 사상체계에서 ‘나 한 사람의 도덕성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메시지를 발견한 것이다.
군사를 지향했던 조광조의 꿈은 영조, 정조 때 실현됐다. 특히 정조는 천주교의 기세를 누르고자 성리학을 더욱 강조했고, 신하들과 중용을 공부하고 논술시험까지 치렀다. 초야에 묻힌 시골 유생을 발굴해 어전에서 중용을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토록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중용’은 어떤 책인가. 중용은 기원전 5세기에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편찬했고, 오랫동안 유교경전인 ‘예기(禮記)’의 일부로 전승됐다. 예기는 기원전 1세기 한나라의 대성이 편찬한 책이다. 그랬던 중용이 한 권의 책으로 독립한 것은 언제였을까. 조선시대 선비와 명나라 학자들은 성리학이 부흥한 송나라 때였다고 믿었다. 주희가 중용 주석서를 내고 기존의 논어, 맹자에 더해 중용과 대학을 ‘사서’, 즉 네 권의 고전으로 선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런 믿음과 달리 중용이 한 권의 책자로 독립한 것은 한나라 때부터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청나라 학자 모기령이 중용의 유래를 상세히 추적한 결과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중용설(說)’이 별도로 언급돼 있어 의심의 여지 없이 독립된 책이었다는 것. 그런데도 조선의 선비들은 성리학의 찬란한 빛에 가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그럼에도 중용은 그 가치를 폄훼하기 어려운 고전이다. 텍스트의 양은 적지만 어떤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지표를 제시했고 변주돼 왔다. 18세기 이후 유교 이외의 새로운 이념이 형성되는 데 중용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대해 “중용에 언급된,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된 경지(천인합일)가 새롭게 정의되었다”고 평했다.
21세기 한국에서 중용의 현재적 의미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 저자는 하늘과 땅, 만물과 사람은 하나로 연결된 존재라는 불가분의 도리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읽어낼 것을 제안한다. 새 시대의 중용 해석은 생명을 존중하는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한 헌장을 되새기는 작업, 즉 생태주의의 길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