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단 '신과 함께-인과 연' 프레스콜
"가난한 사람들은 서울에 살면 안 되나.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다 같이 살면 안 되나…."(웹툰 '신과 함께_이승편' 중)
지난해 개봉한 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은 드라마틱한 서사와 화려한 영상미로 천만 관객을 불러모은 수작이다.

그러나 원작 웹툰에 견줘 영화에선 다소 가려진 이야기가 있다.

재개발로 밀려난 철거민들의 진짜 목소리다.

서울예술단이 21일 무대에 올린 동명의 창작가무극(뮤지컬)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서울 강북의 달동네 한울동. 어린 동현(이윤우 분)과 늙은 할아버지(박석용 분)가 단둘이 폐지를 주우며 산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고 주민들이 이주를 거부하자 철거용역 회사가 팔을 걷어붙인다.

철거용역 박성호(오종혁 분)의 사정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취업에 실패하고 고시원을 전전했다.

빚에 시달리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8년 된 주택청약통장까지 깼다.

손에 피를 묻히는 사람도, 피 흘리는 사람도 모두 약자다.

몽둥이를 든 박성호는 당장 먹을 게 없고, 쫓겨나야 하는 동현이네는 갈 곳이 없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나만큼 불쌍한 사람 없다.

양심 따위 시멘트로 덮어버리자"고 읊조리는 박성호 뒤로 '여기 사람이 있다'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김태형 연출은 이날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이 작품은 인간의 존엄성을 다루는 이야기"라며 "사실 스케줄이 안 맞았는데 무대가 LG아트센터라는 말에 하겠다고 했다.

'역삼동에서 철거민이 시위하는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 수 있다고?'라고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원작 웹툰의 주호민 작가는 2009년 용산참사를 보고 박성호 에피소드를 썼다.

서울예술단은 10년 전 이야기를 다시 뮤지컬로 극화하는 데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김 연출은 "초반에는 철거민 이야기를 줄이고 신과 저승차사 이야기로 밀고 나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 아현동에서 한 철거민이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났다.

2018년 서울 한복판에서 철거 문제로 사람이 죽을 수 있구나, 이게 지나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옆에서 벌어지는 일이구나 싶어서 과감하게 전면에 내세우게 됐다"고 했다.

인간이 집을 사람과 신이 함께 깃드는 공간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신들은 견딜 재간이 없다.

가택신의 우두머리 성주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안방을 지키는 산신, 변소를 지키는 측간신, 문을 지키는 문왕신…. 수많은 신은 재개발과 재건축에 밀려 소멸한다.

이들이 사라진 자리는 '래미안', 'e편한세상' 브랜드가 대체한다.

김 연출은 "언젠가부터 집은 함께 나누는 따뜻한 공간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 됐다.

낡은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재개발도 있지만,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며 "복을 부르고 화를 피하려던 행동이 점점 사라지는 게 가택신의 소멸로 묘사됐다"고 말했다.

극중 박성호는 원작에서 그리 비중이 큰 캐릭터는 아니었다.

한아름 작가는 각색 과정에서 박성호를 주연급으로 키워 '강자는 악하고, 약자는 선하다'는 통념에 균열을 냈다.

철거용역 조끼를 입고 몽둥이를 휘두르던 박성호는 극이 끝날 무렵 전국철거민연대(전철연) 조끼를 입고 자신이 보고 행한 불법을 세상에 고백한다.

한 작가는 "자료 조사를 하며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구호가 가슴 아팠다.

용산참사부터 청계천까지, 시대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이 땅에는 수많은 박성호가 있다.

그들이 왜 지금도 투쟁하는지, 그들이 말하는 생존권과 주거권이 무엇인지 관객과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박성호가 어떻게 살아갈 것 같냐는 물음에는 잠깐 고민하다 "새로 얻게 된 삶에 대한 감사함, 과거 선택에 대한 후회를 통해 같은 처지 사람들을 위해 이타적 삶을 살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박성호 역을 맡은 클릭비 출신 배우 오종혁은 쟁쟁한 배우들 속에서도 안정적인 연기를 펼쳤다.

그는 "집을 얻기 위해 남의 집을 부숴야 하는 선택에 기로에 놓인 상황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최대한 표현하려 노력했다"고 했다.

다만, 성주신 역 배우 고창석은 이날 불안한 음정과 발음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고창석은 "의욕이 앞서서 (연습을 많이 하느라) 목이 많이 안 좋다.

수십편 영화를 찍고 공연했지만 이렇게 의욕적으로 공연한 건 처음"이라며 "'성주'가 되기 위해 살이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관객분들께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주호민 작가는 "창작가무극이 영화보다 좀 더 명징하게 주제에 집중하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며 "원작자인데 부끄럽게도 눈물이 나더라. 참느라 고생했다.

서울예술단이 '신과 함께' 신화편도 만든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이라고 했다.

29일까지 공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