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물 켠' 거리측정기 업체들
“실망스럽죠. 누구에게 따질 수도 없고요. 큰 변화의 바람이 불 거라고 생각했는데….”

국내 한 거리측정기 판매업체 임원은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기대에 부풀었다. 미국골프협회(USGA)와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올해부터 모든 골프대회에서 공식적으로 거리측정기 사용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국내 프로대회에서도 거리측정기를 쓰는 사례가 늘고, 일반 골퍼 보급률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란 기대가 컸다. 이를 위해 유명 프로골퍼를 모델로 쓰는 마케팅 계획까지 세워놨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결과, 하릴없이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 돼가고 있다.

새 룰이 적용된 올해 1월 1일부터 지난 10일까지 미국프로골프(PGA)투어 11개 대회, 유럽투어(EPGA) 9개 대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5개 대회가 열렸다. 지난 7일에는 일본여자골프투어(JLPGA)도 개막했다. 하지만 모든 대회에서 캐디와 선수가 야디지북을 꺼내들고 눈으로 거리를 가늠하는 예전 방식이 그대로 사용됐다. 거리측정기를 사용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선수들이 ‘프로답지 못하다’며 거리측정기 사용을 꺼린 게 아니다.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쪽은 오히려 지역투어다. PGA, LPGA 등 프로골프계를 주도하는 주요 투어가 조용히 거리측정기 사용을 금지했다. 개정된 새 골프 규칙에 따르면 아마추어 골퍼는 물론 투어 프로들도 올해부터는 거리측정기(고도 보정은 불가, 단순거리 측정만 허용)를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로컬룰로는 금지할 수 있게 했는데, 각 투어가 변화보다는 관행을 선택한 것이다. 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강성훈 프로는 “사용이 허용된다면 선수들은 누구나 다 거리측정기를 쓰려 할 것이다. 시간이 절약되고 거리 정확도가 확실히 높아지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투어가 아직은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핵심 투어들이 기존 방식을 고수하면서 국내 남녀 프로골프 투어에서도 거리측정기 사용은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관계자는 “해외 투어들이 전향적으로 허가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먼저 (사용하라고) 나서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해 이 같은 전망을 뒷받침했다. 국내 또 다른 거리측정기 유통사 관계자는 “거리측정기 관련 규칙은 올해 바뀐 룰 중에서 가장 먼저 사문화되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