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욥의 회개를 촉구하는 친구들’(1805). 미국 ‘더 모건 라이브러리&미술관’ 소장.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 욥의 불행의 원인을 찾는다. 그들은 그가 무엇인가 잘못했기에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온몸에 몹쓸 피부병이 걸려 죽게 된 욥을 그의 아내가 불쌍하게 쳐다보고 있다. 욥은 자신의 고통과 삶의 존재 이유를 숙고하기 시작한다.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욥의 회개를 촉구하는 친구들’(1805). 미국 ‘더 모건 라이브러리&미술관’ 소장.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 욥의 불행의 원인을 찾는다. 그들은 그가 무엇인가 잘못했기에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온몸에 몹쓸 피부병이 걸려 죽게 된 욥을 그의 아내가 불쌍하게 쳐다보고 있다. 욥은 자신의 고통과 삶의 존재 이유를 숙고하기 시작한다.
누가 영웅인가. 남들과 비교해 월등한 능력을 지닌, 반은 신이며 반은 인간인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영웅인가? 아니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재난과 불행을 맞이해 영웅적인 극복을 보여준 사람인가?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전형적인 반신반인의 영웅이다. 그는 인류 최초의 도시인 우룩(오늘날 이라크 남부 알-와르카)의 전설적인 왕이었다. 그는 암소여신 닌순과 우룩의 사제였던 루갈반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탁월한 힘과 지혜를 소유한 길가메시에겐 친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우룩 시민들을 괴롭히는 일로 소일했다. 우룩 시민들은 신들에게 탄원해 길가메시가 함께 지낼 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두 종류 영웅

그 친구의 이름이 ‘엔키두’다. 엔키두는 사막에서 태어난,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 ‘반인반수(半人半獸)’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우룩 한복판에서 운명적으로 만나 한 판 씨름을 하며 힘을 겨룬다. 이들은 이 싸움을 통해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신들은 길가메시의 오만함을 가르치기 위해 그의 단짝이자 반쪽이 된 엔키두를 병들어 죽게 한다.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죽음으로 권력과 명성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그 이후 실제로 죽음을 극복해 준다는 불로초를 찾아 나선다. 죽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지하세계로 내려가 우트나피슈팀을 만난다. 우트나피슈팀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지하세계에서 영생을 사는 자다.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슈팀이 알려준 불로초를 찾아 떠난다. 페르시아만 심연으로 잠수해 내려가 마침내 불로초를 손에 넣는다. 그가 고향 우룩으로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너무 더워 개울에서 수영하는 동안 뱀이 나와 불로초를 먹고 자신의 껍질만 남겨놓고 사라진다. 길가메시는 어리석은 행동을 자책하며 울었지만, 지혜로운 자가 돼 우룩으로 돌아와 훌륭한 왕이 됐다.

길가메시와 대조되는 또 다른 영웅이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욥이다. 욥은 신이 인정한 영웅이다. 그는 남에게 정직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는 ‘흠이 없는 온전한 인간’이다. 욥은 자신의 잘못을 돌볼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살펴 그들의 잘못이나 실수까지 신에게 대신 용서를 비는 완벽한 인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방의 제일가는 부자였다. 이스라엘의 신 야훼는 ‘신들의 모임’에서 욥이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자랑한다. 신들 중에는 사탄이 있었다. 원래 사탄은 우리가 아는 악마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사탄은 신이 자랑하는 욥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시험하는 자’다. 사탄은 욥의 물질적인 풍요와 열 명의 훌륭한 자식이 있어 신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욥이 신을 찬양하는 이유는 세속적인 복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야훼는 욥의 신실함을 알고 싶어 사탄에게 욥의 세속적인 복을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욥에게 재난이 닥쳐 그의 재산이 다 사라지고 열 자녀도 하루아침에 사고로 죽는다. 그러나 욥은 흔들리지 않고 신을 의지하고 믿는다. 야훼는 신앙을 유지하는 욥을 다시 한번 신들의 모임에서 자랑한다. 그러자 사탄은 또다시 신에게 도전한다. “만일 욥이 스스로 몹쓸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된다면, 그는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야훼는 욥의 신앙을 다시 시험하기로 결정한다. 욥이 온몸에 피부병이 걸려 거의 죽게 됐다. 욥은 아무런 이유 없이 형용할 수 없는 운명적 시험을 당하고도 신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이 시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알기 위해 지적이면서 영적인 탐구를 시작한다. 욥은 길가메시와는 다른 보통 인간으로서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은 영웅이다.

또 다른 영웅,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가 상상해 낸 오이디푸스는 길가메시나 욥을 초월하는 영웅이다. 오이디푸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비참한 장님 추방자에서 아테네와 콜로노스를 구원하는 영웅이 된다.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왕이었다가 방랑하는 걸인이 됐다. 거룩하고 정결한 공간을 확보하는 신적인 왕에서 그 공간을 오염시키는 불행의 상징이 됐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지고 가는 비극적인 왕으로, 거친 운명의 희생양이 된 인간 불행의 상징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전달하는 운명의 부정적인 변화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전복된다. 이제 오이디푸스는 낯선 땅 콜로노스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며 비극을 초월해 신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그는 비극적 영웅이지만 동시에 신적인 존재가 된다. 오이디푸스의 시신은, 그것을 소유한 도시에 전쟁에서의 승리와 지속적인 안녕을 보장하는 보루(堡壘)다. 새로운 오이디푸스는 그에게 부과된 비이성적인 저주에서 풀려나 아테네를 위한 이성적인 번영의 상징이 됐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초인적인 힘으로 감당해야 했던 인생을 터부의 공간에서 돌아봤다. 이곳엔 인간을 심판하는 여신들이 살고 있는 경계다. 이 여신들은 그 안에 진입하는 자의 마음가짐과 결심에 따라 정죄하는 ‘분노의 여신’이 되거나 축복하는 ‘자비로운 여신’이 된다.

오이디푸스는 임박한 죽음의 그림자를 보며 아테네 왕인 테세우스에게 유언한다. “내 목숨의 저울이 기울었습니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그대와 이 도시에 준 예언을 저버리고 싶지 않습니다.”(1508~1509행) 그 예언이란 자신의 죽음과 시신이 상서로운 복이라는 선언이다. 테세우스는 이 보잘것없는 장님에게 그 증거를 대라고 요구한다. 오이디푸스는 “저 끊임없는 천둥소리와 아무도 이긴 적이 없는 팔에서 내던져진 번쩍이는 번개들이 그 증거들”(1519행)이라고 말한 후 자신을 콜로노스와 아테네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저주가 아니라 ‘세월을 초월하는 보물’이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누가 오이디푸스를 보물이라고 정의했는가? ‘세월을 초월하는 보물’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제 곧 나는 인도자의 도움 없이, 혼자서 내가 죽을 장소로 가는 길을 그대에게 보여주겠소.”(1520~1521행) 그리고 그는 그 길을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오이디푸스가 지금 막 가려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곳은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신성한 곳이다.

비극, 공동체 의례

비극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심연에 진입해 헤아려 알려는 노력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킨다. 테베에서 온 터부 그 자체인 오이디푸스가 아테네인들에게 안녕을 선사한다. 비극은 이제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경계를 희망과 생명이 생동하는 장소로 변화시킨다. 오이디푸스가 상징하는 역병, 비도덕, 그리고 죽음이라는 응어리가 이 비극 작품을 통해 정화되고 해소됐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저주가 아니라 복의 원천이 되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통해 아테네와 그리스를 구원하는 영웅으로 태어난다. 오이디푸스 개인의 악몽은 아테네 모든 시민들이 함께 슬퍼하는 공감이 됐다. 오이디푸스의 가장 끔찍한 저주가 이 비극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아테네 시민 관객들이 참여하는 비극 경연이란 의식을 통해 사라진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목격한 아테네 시민들은 말한다. “하데스(지하의 신)여, 하데스여. 내 말을 들어주소서! 저 나그네(오이디푸스)가 고통을 당하지 않고, 통곡을 자아내는 운명도 맞지 않고 모든 것을 안에 감추고 있는 하계로, 사자들의 들판과 스틱스 강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소서! 수많은 슬픔이 이유도 없이 그를 덮쳤으니, 그 보상으로 어떤 정의로운 신께서 그를 높여주시기를 바랍니다!”(1559~1567행)

이 비극을 관람하고 있는 아테네 시민들은 야외 원형 극장에 함께 앉아 있는 동료 시민들의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삶도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같은 비참한 운명의 연속이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시민들의 운명적인 고통이 비극 경연이란 시민의례를 통해 사라진다. 그들은 비극을 관조하고, 그 등장인물의 터부를 그대로 수용해 더 나은 아테네라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위한 희망의 발판으로 변화시킨다. 소포클레스는 그의 마지막 작품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죽음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소포클레스의 심정을 약 2300년 후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가 ‘비잔티움으로 가는 항해’(1928년)라는 시에 담으려 했다. 예이츠에게 비잔티움(이스탄불의 옛 지명)은 영적인 여정의 은유다. 그는 이 시에서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맞이하는 인류의 정신을 제2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노인은 한낱 하찮은 물건, 막대기에 걸쳐진 누더기 외투, 다만 영혼이 손뼉을 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누더기 조각을 위해 더 크게 노래하지 않는다면, 혹은 영혼의 장엄함을 기록한 기념물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노래하는 학교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항해해 거룩한 도시 비잔티움으로 왔노라.”

초인적인 인내로 감당한 운명… 희생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예이츠의 감성과는 달리 종교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장엄하다. 오이디푸스는 아테네 시민 각자에 숨어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괴물을 무대 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다름’이라는 터부를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도록 훈련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가장 저주받은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공감의 능력이 생겼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