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균여가 쓴 《균여전》에 따르면 신라 말 해인사에는 관혜와 희랑이라는 화엄학의 두 대가가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관혜는 후백제의 견훤을, 희랑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왔다. 후삼국을 통일한 후 왕건은 그 공에 대한 보답으로 밭 500결(結)을 내렸고, 희랑대사는 이를 해인사 중건에 썼다. 이런 희랑대사의 모습을 목재심과 직물, 종이 등으로 만들고 옻칠한 것이 10세기 중엽 고승의 조각상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이다.국립중앙박물관이 천년 세월을 넘어 희랑대사와 왕건의 만남을 추진 중이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오는 12월 개막하는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에 희랑대사좌상과 평양에 있는 왕건상을 모셔와 나란히 전시하겠다는 것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를 통해 남북관계가 더 가까워질 수 있으면 금상첨화 아니겠느냐”고 했다.고려 관련 전시·행사 봇물고려는 918년 음력 6월 병진일(양력 7월25일)에 건국됐다. 건국 1000년이던 1918년에는 일제강점기여서 기념행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1100주년을 기념하는 박물관, 지방자치단체 등의 전시·행사들이 풍성하다. 지난해 12월 ‘삼별초와 동아시아’ 특별전으로 고려 관련 전시의 첫 테이프를 끊은 국립제주박물관은 다음달 고려철화청자를 주제로 전시를 시작한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지난 22일부터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한 고려 왕실사찰 개태사 특별전을 열고 있다.전시의 대미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대고려전’이 장식할 예정이다. 청자, 불화 등 국내외의 고려 유물은 물론 2006년 서울에 왔던 평양의 왕건상을 비롯해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등 50여 점의 북한 유물 대여도 북측에 요청해 놓았다. 프랑스에 있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도 빌려오겠다고 한다.지자체들 움직임도 활발하다. 인천시는 다음달 28~29일 강화도에서 고려시대를 주제로 한 고려역사문화제를 열 예정이다. 남북 학술교류도 모색 중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경기문화재단, 국립해양박물관, 전라남도 등도 해양강국이자 문화강국, 외교강국이었던 고려를 재조명하는 학술행사를 잇달아 열 예정이다.융합·포용·통합을 배우자475년간 존속한 고려의 주변 정세는 내내 험난했다. 동북아는 송, 요(거란), 금(여진)이 각축하는 격동기였다. 송과 친선관계를 맺자 거란이 시비를 걸며 쳐들어왔다. 당시 서희 장군이 외교적 담판으로 거란 군대를 돌려보내고 강동 6주까지 되찾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대제국 몽골이 무려 27년 동안 고려를 침략하고 괴롭혔지만 버텨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고 하지 않았던가.고려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문화를 버리지 않고 계승했다. 주변국과도 활발히 교류하며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세계에 ‘코리아’라는 이름을 알린 것도, 고려자기·고려불화·고려인삼·금속활자·대장경·나전칠기 등 세계적인 명품 문화를 가장 많이 만들어 낸 것도 고려다.그런 고려의 경쟁력은 다양한 가치의 융합과 포용, 통합에서 나왔다는 게 다수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지금 한반도 정세는 그야말로 격동기다. 북핵을 둘러싸고 주변국들과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우리 처지가 꼭 송과 거란, 여진, 왜구에 둘러싸여 머리를 싸매야 했던 고려를 떠올리게 한다. 통일신라와 조선 사이에 ‘낀 시대’쯤으로 여겨져온 문화강국, 외교강국 고려를 다시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fireboy@hankyung.com
동쪽 다싱안링(大興安嶺)산맥에서 서쪽 알타이산맥, 북쪽 바이칼 호수에서 남쪽 만리장성 사이에 있는 몽골인의 땅, 몽골리아. 13~14세기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이 몽골제국을 건설하기 전에도 숱한 민족들이 이 땅을 거쳐갔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흉노가 최초로 국가를 세웠고, 이어 선비와 유연, 돌궐, 위구르, 키르기스, 거란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그중 흉노는 중국의 진·한과 맞설 만큼 세력이 강했다. 돌궐은 아시아 내륙의 초원과 오아시스 대부분을 하나로 통합한 거대 유목 제국으로 성장했다.국립중앙박물관에서 16일 개막하는 특별전 ‘칸의 제국 몽골’은 이 거대한 땅 몽골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자리다. 몽골에서 인류가 살기 시작한 80만 년 전 선사시대부터 흉노, 돌궐 등이 세운 고대 유목 제국, 칭기즈칸의 몽골제국과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족들이 남긴 대표 유물 536점이 전시된다.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고고학연구소, 몽골 국립박물관, 복드 칸 궁전박물관이 전시를 위해 소장품을 내놓았다. 그중 16건 90점은 몽골 국가지정문화재다.전시는 크게 3부로 구성됐다.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조명하는 ‘제국의 여명: 선사시대 몽골’로 시작해 흉노와 돌궐 등이 이룬 고대 유목 제국, 칭기즈칸을 필두로 몽골제국의 흥망, 역사 속 몽골과 한국의 교류 등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선사시대 몽골에서는 산양 모양으로 조각한 칼자루 끝장식, 사슴과 산양을 장식한 항아리, 청동솥, 청동 말재갈과 굴레장식, 몽골 서북부 영구동토층에서 나온 초기철기시대 털외투 등을 볼 수 있다. 고대 유목 제국과 관련해서는 원거리 교역을 통해 수준 높은 문화를 누렸던 흉노의 유물들이 눈길을 끈다.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그리스 신이 있는 은제 장식’은 흉노가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도시국가를 통해 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을 색실을 이용해 자수로 표현한 흉노 유물의 직물은 과학적인 분석 결과 원산지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밝혀졌다.8세기께 돌궐 카간(황제)의 제사유적에서는 화려한 금관을 비롯해 금제품 78점, 은제품 1878점, 보석 26점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돌궐 제2제국의 장군이었던 퀼 테긴의 두상, 각종 무기류와 갑옷, 13~14세기 파라오 모양의 가면, 불교 유물 등도 전시된다. 전시는 7월17일까지. 성인 6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유아 3000원. 박물관·미술관 주간인 16~20일엔 무료다.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