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계에선 여자 선수의 최전성기를 20대 초·중반으로 본다. 20대 후반만 돼도 ‘노장’ 소리를 듣고, 30대가 되면 ‘왕언니’급으로 분류되기 일쑤다. 탄력과 유연성으로 무장한 10대 골퍼가 투어를 지배하는 사이, 잦은 부상과 체력 고갈에 허덕이던 노장이 담담히 퇴장을 선언하는 일은 특별할 것 없는 현실이었다.

요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유난히 ‘베테랑’들의 맹활약이 두드러진다. 2018 시즌 개막전을 1985년생 브리트니 린시컴(미국)이 제패한 데 이어 네 번째 대회(미셸 위·1989년생), 다섯 번째 대회(박인비·1988년생)까지 고참들이 트로피를 챙겨갔다. 올 시즌 여섯 번째 대회인 기아클래식(총상금 180만달러)도 노장들이 우승경쟁을 주도하고 있다.

◆지은희 김인경 첫 승 가자

25일 열린 이 대회 3라운드는 공동선두 3명(지은희, 김인경, 리젯 살라스)이 모두 1980년대생으로 채워졌다. 지은희(32)가 이날 보기 없이 버디 5개를 잡아 5언더파를 쳐 중간합계 11언더파 공동선두에 올라섰고, 전날까지 8언더파 2위였던 김인경(29)이 3타를 추가로 덜어내며 선두 그룹에 합류했다. 통산 1승의 살라스 역시 3타를 줄여 2승째를 노린다.

지은희는 이번 대회에서 통산 4승째를 노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스윙잉스커츠챔피언십에서 8년 만에 LPGA 투어 정상에 오른 지 5개월여 만에 잡은 우승 기회다. 지은희는 “겨우내 교정한 스윙에 적응하면서 샷이 좋아지고 있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지난해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 등에서 3승을 거두며 최고의 한 해를 보낸 김인경은 통산 8승 길목에서 선배와 양보 없는 우승 다툼을 벌이게 됐다.

선두그룹을 추격하는 2위 그룹(공동 4위)도 대만의 차세대 주자 수웨이링(24) 한 명을 제외하고 세 명 모두 1970~80년대 출생한 ‘왕언니’급이다. 3라운드까지 10언더파를 친 신디 라크로스(31·미국)는 아직 우승이 없는 무명 선수지만 2010년 LPGA에 데뷔해 올해로 투어 9년 차에 들어선 베테랑이다. 카롤린 헤드발(29·스웨덴)도 2011년 미국 무대에 데뷔한 8년 차 고참으로 생애 첫 승을 기대하고 있다. 2라운드까지 5타 차 단독 선두를 질주했던 크리스티 커(미국)는 설명이 필요 없는 노장이다. 박세리와 동갑내기(1977년생)인 그는 1997년 LPGA 투어에 데뷔한 뒤 지금까지 메이저 2승을 포함해 통산 20승을 수확했다.

◆남녀 투어에 부는 ‘노장들의 반란’

LPGA는 ‘살아있는 전설’들이 현역으로 뛰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올해 만 58세인 1960년생 줄리 잉스터는 지난해 10번이나 대회에 출전해 7번 커트 통과에 성공했다. 이 중 뱅크오브호프파운더스컵에서는 딸뻘인 후배들과 실력을 겨뤄 공동 24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호주 투어에서 주로 뛰고 있는 카리 웹(44)도 ‘짱짱한’ 현역이다. 통산 41승을 기록 중인 웹은 지난해 틈틈이 18개의 LPGA 대회에 출전해 ‘강철체력’을 과시했다. 그해 7월 열린 스코티시여자오픈에서는 우승경쟁까지 펼친 뒤 공동 2위로 대회를 끝마쳐 후배들을 놀라게 했다.

드물게 나타났던 노장들의 선전은 갈수록 빈도가 늘어나는 추세다. ‘영원한 현역’ 로라 데이비스(55)도 지난주 열린 뱅크오브호프파운더스컵에서 우승경쟁을 펼친 끝에 공동 2위에 올라 ‘노장 시대’를 알렸다. 국내 투어에서도 1986년생 홍란이 지난주 8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임경빈 프로(JTBC 해설위원)는 “과학적인 신체관리 시스템이 보편화되고 여기에 철저한 자기관리 노력 등이 어우러지면서 골프에서도 나이를 초월하는 성과가 늘어나고 있다”며 “최근 부활한 타이거 우즈나 필 미켈슨의 사례도 자신감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