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숙 지음 / 민음사 / 327쪽│2만4000원
이 벌거벗은 생명들은 가혹한 체제 아래에서도 살아남고 저항하며 나름의 생존술을 익혔다. 칼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땅 시베리아에서도 살아 움직였다. 《시베리아 유형의 역사》는 시베리아 유형 제도 속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썼다.
시베리아 유형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과 함께 시작됐다. 시베리아에는 원래 아시아계 수렵·유목민들이 살았다. 러시아는 이곳의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16세기 후반부터 정복을 시작했다. 러시아는 17세기에 시베리아 유형을 법제화하고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싶은 사람을 여기로 보냈다. 자원을 채굴하고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만들게 하면서 차후에는 이곳을 영토로 통합시키기 위해 유형자들을 이용했다.
시베리아로 유배된 사람들의 계층이나 신분은 다양했다. 살인 강도 등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부터 떠돌이나 좀도둑 같은 경범죄자, 전쟁 포로, 정치범, 군주의 총애를 잃은 고위직 등 온갖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떠밀려왔다. 이들은 광산이나 공장 등에서 중노동을 하며 형기를 살았다.
혹독한 환경과 비인간적 처우 속에서도 유형자들은 계몽의 싹을 틔웠다. 주역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사회활동을 하다 유배된 정치범들이었다. 라디시체프라는 인물은 시베리아 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의료활동과 학술활동을 했다. 《시베리아 지리노트》라는 연구 결과물을 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형 생활을 하면서 인간애에 눈을 떴다. 그는 “나는 가장 교육받지 못하고 압박받은 계층일지라도 정신적으로 가장 섬세하게 발달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는 글을 썼다.
저자는 시베리아 유형자들이 남긴 기록과 당대의 행정 기록, 학계의 연구 등을 토대로 시베리아 유형의 실체를 여러 방향에서 조명했다. 식민지로서 시베리아라는 공간에 대한 고찰과 유형수들의 생활, 문화에 대한 생생한 사례가 빛난다. 저자는 “이 책은 국가가 구성원을 통제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이자 지배받는 자의 생명력이 지배하는 자의 권력에 대해 거둔 작은 승리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