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문에 휩싸인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대표작 ‘오구’.
성추문에 휩싸인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대표작 ‘오구’.
문단과 영화계를 중심으로 번진 문화예술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연극계에서도 본격 시작됐다. 연극인들이 이달 초 배우 이명행의 스태프 성추행 의혹을 밝힌 데 이어 14일 극작가 겸 연출가 이윤택(사진)이 과거 저지른 성추행을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가 폭로했다.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고은 시인에 이어 연극계 거장 이윤택 연출도 성추문 한가운데 서게 되면서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에 더욱 불이 붙을 전망이다.

김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MeToo’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올린 글에서 10여 년 전 지방 공연 당시 자신이 겪었던 성추행 피해를 폭로했다. 가해자는 이 연출이다. 김 대표는 당시 이 연출이 ‘기를 푸는 방법’이라며 연습 중이나 휴식 때 여자 단원에게 안마를 시켰고 사건 당일도 자신을 여관방으로 호출했다고 밝혔다. 그는 “안 갈 수 없었다. 그 당시 그는 내가 속한 세상의 왕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가 누워있었다. 예상대로 안마를 시켰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가 갑자기 바지를 내렸다”고 적었다. 김 대표는 이후 이 연출이 자신을 추행했고 ‘더는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방을 나왔다고 했다.

김 대표는 “이제라도 이 이야기를 해서 용기를 낸 분들께 힘을 보태는 것이 이제 대학로 중간선배쯤인 것 같은 내가 작업을 해나갈 많은 후배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페이스북 글을 맺었다. 김 대표는 이 연출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당시 공연했던 연극이 이 연출의 대표작 ‘오구’였고 지방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곳이 이 연출의 거점인 밀양이라고 언급한 데서 가해자가 이 연출임을 암시했다.

이 연출은 이날 “지난 잘못을 반성한다”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근신하겠다”는 입장을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를 통해 전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이 연출의 지휘로 내달 1일부터 무대에 올리기로 했던 ‘노숙의 시’ 공연을 취소했다. 하지만 ‘성의 없는 사과’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향후 활동과 관련한 명확한 태도나 명시적 사과가 없었다는 지적이다.

이 연출은 1986년 부산에서 연희단거리패를 창단한 뒤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며 국내 연극계에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적인 극 양식을 개척하고 독특한 무대미학을 구현했다는 평가로 동아연극상, 대산문학상, 백상예술대상, 서울연극제 대상 등을 받았다.

그의 성추문에 대한 구설은 연극계에 암암리에 파다했다. 과거 국립극단과 작업할 때 극단 직원을 추행한 논란도 있었다. 국립극단은 당시 사건이 공론화되길 원치 않는다는 피해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연출을 향후 제작에 참여시키지 않기로 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연극계는 하루종일 들썩였다. 김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폭로글은 12시간여 만에 1200명이 넘는 페이스북 이용자의 공감을 받고 280여 회 공유됐다. 지난 11일엔 유명 배우 이명행이 과거 성추행 논란에 휩싸여 출연 중인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중도 하차했다. 한 극단 관계자는 “예술계 선배라는 권위에 취하고 배우 캐스팅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 등을 무기 삼아 후배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은 연극계 권위자들이 반성하고 바뀌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