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거친 바람에 당당히 맞서 성곽처럼 우뚝 솟은 돌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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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12> 한국의 이스트섬 완도군 여서도
300년 역사의 돌담 그대로 보존
산비탈 따라 돌밭에 구들장 논 펼쳐져
패총·고인돌·손으로 파낸 성혈바위
선사시대 때 사람 살았던 흔적들 남아
여호산에서 바라본 다도해 풍경 '장관'
완도·청산도·보길도·한라산까지 뚜렷
<12> 한국의 이스트섬 완도군 여서도
300년 역사의 돌담 그대로 보존
산비탈 따라 돌밭에 구들장 논 펼쳐져
패총·고인돌·손으로 파낸 성혈바위
선사시대 때 사람 살았던 흔적들 남아
여호산에서 바라본 다도해 풍경 '장관'
완도·청산도·보길도·한라산까지 뚜렷
300년 역사의 돌담이 원형대로 보존
여서도로 가는 뱃길은 멀고 불편하다. 완도에서 하루 한번뿐인 여객선으로 세 시간을 가야만 도달할 수 있다. 총 연장 2㎞, 300년 역사의 돌담이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멀고 불편한 뱃길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여서도 돌담이 근래에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여서도 돌담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도로공사로 인해 돌담 일부가 파괴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필자가 몸담고 있는 섬연구소에서 여서도 돌담 지키기 운동을 시작했고 전라남도와 협력해 여서도 주민들의 동의를 이끌어내 돌담은 원형대로 보존됐다.
여서도는 물이 풍부해 논도 제법 됐다. 대부분 등대 너머 노루목의 계단식 다랑논이었다. 여서도에도 청산도처럼 구들장 논도 남아 있다. 비탈진 땅의 대부분에는 다랑논을 만들었는데 어째서 일부 땅에만 구들장 논을 조성한 것일까. 흔히 구들장 논은 통수로에 주목해 “쌀 한 톨을 생산하기 위해 물 한 방울까지 아껴 쓴 농민들의 지혜가 깃든 농업 문화의 정수”라고 알려져 있다. 물을 재활용하기 위해 구들장 논을 만들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서도나 청산도의 그 많은 다랑논은 물을 아끼거나 재활용하지 않았단 말인가? 다랑논이든 구들장 논이든 평지의 논이든 천수답은 대체로 물을 아끼고 재활용하는 구조로 조성됐다. 그렇다면 구들장 논을 만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돌밭 활용이다. 돌무더기 땅까지도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구들장 논을 만든 것이다. 비탈이더라도 흙으로 이뤄진 땅은 다랑논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런데 섬에서는 그런 다랑논마저 부족하니 돌밭까지도 구들장 논으로 만든 것이다. 구들장 논은 돌밭에 물이 새지 않게 구들장 같은 평평하고 넓은 돌들을 깔고 그 위에 방수 처리를 한 뒤 흙을 채워 논을 만든 것이다. 하층부에는 통수로를 만들어 물을 재활용했다. 이것이 구들장 논의 진실이다.
제주 오가는 선박의 중간 기착지
여서도는 2.51㎢의 땅에 40가구 6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창 때는 300가구 2000명까지 살기도 했다. 과거 여서도는 제주를 오가는 선박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제주 어선들도 많이 들락거렸다. 테우(떼배)를 타고 건너와 자리돔을 잡아가는 제주 어부들도 있었다. 여서도 바다는 옛날부터 황금어장이었다. 여서도 사람들이 지닌 동력선만 50여 척이 넘었던 적도 있다. 인근 청산도에 고등어와 삼치 파시가 섰던 것도 여서도 어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서도 어부들은 고등어나 갈치를 ‘염장’해서 경남 통영과 삼천포까지 팔러 다니기도 했다. 고등어, 삼치 파시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다가 남획으로 인한 어자원 고갈로 지금은 사라진 문화가 됐다. 하지만 지금도 가을, 겨울에는 삼치 잡이가 제법 활발하다. 여서도 일대가 삼치 산란장인 까닭이다.
여서도의 주산인 여호산은 잘 보존된 숲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산정에서는 완도, 청산도, 보길도, 소안도 등의 섬들이 연출하는 다도해 풍경이 장관이다. 맑은 날이면 한라산까지 뚜렷이 보인다. 제주도 조천까지 거리가 40㎞에 불과하니 왜 아니겠는가. 여호산 마루에는 해양사의 중요한 유적 하나가 있다. 요망대(瞭望臺)다. 돌담으로 쌓아 만든 요망대는 군사시설이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감시초소. 여서도 요망대는 대원군 시절 이양선을 감시하기 위해 세워졌다. 둘레 20m, 높이 1.5m 정도인 요망대 바닥에는 구들장이 있는데 추운 겨울 요망대를 지키던 봉군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깔아놓은 것이다. 근처에는 봉군들이 숙식하던 집터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섬 주민들이 봉군으로 차출돼 요망대에서 근무했다. 요망대를 지나 하산 길에 있는 윗당산은 제법 규모가 크다. 돌담 안의 당숲 거목들도 신령스럽다. 여호산 등반은 겨울이 좋다. 여름에는 조심해야 한다. 뱀이 지천이다. 특히 비오고 난 뒤에는 몸을 말리려고 나온 뱀이 등산로에 쫙 깔려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이때는 등반을 삼가는 것이 옳다. 돌담 또한 담쟁이가 가리지 않는 겨울부터 초봄에 가야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강제윤 시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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