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미국 러스트벨트인 미시간주 워런에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가 지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3월 미국 러스트벨트인 미시간주 워런에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가 지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굴지의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J D 밴스. 올해 33세인 그는 예일대 로스쿨 출신의 백인 청년이다. 예일대에서 만난 유복한 집안 출신의 우샤와 결혼했다. 반려견 두 마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의 삶에서 고난의 흔적을 얼른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책마을] 미국 백인 노동계층의 가장 큰 적 '학습된 무기력'
《힐빌리의 노래》는 밴스의 회고록이다. 고작 서른세 살짜리가 무슨 회고록이냐고? 그의 짧지만 곡절 많은 삶, 빈곤과 무너져가는 가족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일궈낸 성공기 내지 성장기는 평범한 사람의 긴 인생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해준다.

두메산골 촌뜨기란 뜻의 ‘힐빌리(hillbilly)’는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rust belt)의 가난한 백인 노동계층을 이르는 말이다. 교육 수준이 낮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시골 사람들을 뜻하는 ‘레드넥(red necks: 햇볕에 그을려 목이 빨갛다는 뜻)’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백인 쓰레기)’ 같은 비하적 표현과 맥을 같이한다. 밴스는 이런 힐빌리 출신으로서 불우한 가정 및 사회환경을 극복하고 오하이오주립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거쳐 실리콘밸리로 진출했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성장기일뿐만 아니라 가난한 백인 노동계층이 밀집한 러스트벨트에서의 삶과 사회 환경을 더불어 살피고 이해하게 해준다.

밴스는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주 철강도시 미들타운에서 태어나 이민 이후 대대로 살아온 켄터키주 잭슨을 오가며 자랐다. 켄터키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그레이트 애팔래치아의 일부다. 그중에서도 잭슨은 켄터키 남동부 탄광지대 중심부에 있는 인구 6000명 정도의 산골 소도시다. 애팔래치아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한다. 같은 백인이라도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동부의 뉴욕 같은 데 비하면 삶의 환경이 천양지차다.

밴스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약물중독자였고, 아버지 ‘후보’는 너무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가 자란 곳 미들타운은 빈곤, 이혼, 마약중독 등 사회 문제의 집약지였다. 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이 쇠퇴하면서 아무런 탈출구가 없는 사람만 남은 도시는 윤리와 문화의 붕괴, 가족 해체, 가난과 소외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누적됐다. 게다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후손인 밴스의 가족, 친지는 전통문화와 관습을 잘 간직했지만 그 때문에 기질적, 사회적으로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 의리와 도덕을 강조한 반면 법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저자는 고교 중퇴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이후 오하이오주립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해 이른바 ‘힐빌리판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저자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마치 소설처럼 정밀하게 묘사하고 당대 사회, 경제적 환경까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는 식의 성공기를 쓰는 대신 빈곤이 개별 가정과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도록 이끈다.

무엇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무기력증에 빠진 백인 노동자의 실태다. 오랜 세월 누적된 가난과 고통 때문에 ‘체념’을 일상화한 게 힐빌리의 가장 큰 문제라고 강조한다. 이를 저자는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했다. 인생에서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노력 부족을 무능력이라고 착각한다는 것.

따라서 백인 노동계층이 변해야 할 점으로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고교 졸업 후 해병대에 입대한 것이 변화의 계기였다. 그 역시 ‘학습된 무기력’ 속에 살았지만 해병대에서 ‘학습된 의지’를 배웠고, 제대 후 대학 진학으로 이어졌다. 군대와 대학에서 만난 선한 사람들의 도움 역시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가정에선 약물중독자였던 엄마 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누나가 그를 지켜줬고, 군대에선 상급자가, 대학에선 예일대의 에이미 추아 교수 같은 사람이 ‘키다리 아저씨’였다.

저자는 공공정책이 마법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며 힐빌리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요소가 뭔지 이해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힐빌리 스스로 문제를 회피하기보다 직시하며 진정으로 강해져야 한다고 꼬집는다. 이 책은 지난해 6월 미국 출간 당시 화제를 일으키며 장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백인 노동계층이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 이유를 설명하는 책으로도 주목받았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