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뚫고 흔들림 없는 버디쇼…'무심 타법' 김인경, 시즌 2승
굳이 욱여넣겠다는 눈빛도 아닌 듯하다. 그래도 공은 홀컵으로 쏙쏙 빨려 들어간다. 원하는 곳을 공이 비껴가도 표정 변화는 없다. 그저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는 게 전부다. 억수비로 경기가 중단되자 전날 보던 스마트폰 영화에 몰두한다. 비가 그치자 아무렇지도 않게 두 홀 연속 버디를 잡아낸다. 김인경(29·한화·사진)식 ‘무심(無心)’골프다. 무심골프의 만개(滿開)다.

◆장타여왕·신예 잠재운 ‘무심타법’

김인경은 24일(한국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실베이니아의 하일랜드 메도스GC(파71·6476야드)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마라톤클래식 최종 4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만 8개를 쓸어 담아 8언더파 63타를 쳤다. 최종합계 21언더파 263타. 2위 렉시 톰슨(미국)을 4타 차로 따돌린 완벽한 우승이다. 상금은 24만달러(약 2억6800만원). 21언더파는 1998년 박세리(40)가 23언더파로 이 대회를 제패한 이래로 최다 언더파 우승 성적이다.

시즌 2승째이자 LPGA 투어 통산 6승째를 신고한 김인경은 올 시즌 2승을 이미 거둔 유소연(27·메디힐)에 이어 두 번째 LPGA 투어 멀티챔프에 이름을 올렸다.

아이언이 공을 홀컵 근처에 잘 떨궈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퍼트가 압권이었다. 4라운드 내내 퍼트 수가 30개를 넘지 않았다. 마지막 날에도 26번에 불과했다. 2~4m짜리 중거리 퍼트는 물론 10m에 달하는 장거리 퍼트(8번홀) 모두 잘 떨어졌다. 드라이버 비거리가 짧았던 것도 아니다. ‘괴물 장타자’인 2위 렉시 톰슨(277.88야드)에 비해 20야드가 짧은 평균 258.88야드를 쳤지만 160㎝의 작은 키를 감안하면 23㎝가 큰 톰슨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거리를 냈다. 김인경은 이 ‘가성비 갑’ 골프로 3라운드까지 2타 차 단독 선두였던 넬리 코다(미국)를 끌어내리고 역전우승을 일궈냈다.

김인경은 “평소 좋아하는 코스라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며 “이번 우승으로 확실하게 자신감을 얻은 만큼 앞으로 더 많은 우승 기회를 잡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주 US여자오픈에서 첫 승을 거머쥔 박성현(24·KEB하나은행)은 공동 6위로 선전했다.

◆K골퍼 한 시즌 최다승 사냥 시동

김인경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선수다. 2005년 US여자주니어선수권을 제패한 데 이어 2006년엔 L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을 공동 1위로 합격했다. 2010년 멕시코에서 열린 LPGA 투어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을 제패한 직후 우승 상금 22만달러를 모두 기부하는 등 통 큰 선행으로도 유명하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승을 거둔 그에게 ‘인생반전’이 찾아온 게 2012년. 메이저 대회인 크라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30㎝ 퍼트 실수로 연장전에 끌려가 우승을 날린 탓에 ‘비운의 골퍼’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후 2013년 KIA 클래식, 2014년 포틀랜드 클래식 등에서 잇달아 연장 패배를 당하자 당시의 후유증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힘들었지만 무너질 순 없었다. 멘탈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또 깨달았다”고 했다. 최악에서도 긍정을 찾아낼 줄 아는 무심골프를 그는 이 기간 터득했다고 했다. 그는 연장 5전5패 징크스와 관련한 질문에 입버릇처럼 “준우승을 다섯 번 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골프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재미있게 골프치는 게 목표”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 보기와 책 읽기, 피아노 치기, 그림 그리기, 외국어 배우기 등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2014년 7월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 ISPS 한다 유러피언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며 담금질을 시작한 그는 지난해 10월 LPGA 레인우드 클래식에서 4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부활을 예고했고, 이어 올해 6월 숍라이트클래식까지 제패하며 김인경 시대의 만개를 자축했다.

김인경의 ‘퍼펙트 우승’으로 한국 선수는 마라톤클래식에서만 통산 11승을 합작해 대회가 ‘K골프의 텃밭’이라는 세간의 말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K골퍼의 올 시즌 LPGA 투어 승수는 20전 10승으로 늘었다. 이대로라면 한 시즌 최다승인 2015년 15승 기록도 깰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