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선 < 강릉 명주교육도서관장 >
“조류독감이 돌면 철새들은 약하고 부상당한 것들 몇 마리만 죽지만, 양계장의 닭들은 모두가 동시에 싹 죽는다. 양계장의 닭들은 공업적 틀 안에서 사육되고 그 형질이 유전되어 생명체로서의 독자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강하거나 약한 차이가 없이 모두 다 일제히, 이탈자 없이 ‘싹’ 죽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얘기를 여러 전문가들한테서 들었다. 이제 닭은 닭이 아니라 닭고기를 만드는 생산공정의 한 단계일 뿐이다.”(27~28쪽)
1년쯤 전에 출간된 이 수필집은 밥, 돈, 몸, 길, 글 다섯 가지 주제로 나뉘어 있다. 작가 김훈은 소설가가 되기 전 기자 시절부터 ‘밥벌이’와 ‘끼니’에 대한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기사를 썼다. 전설적인 산문 밥벌이의 지겨움이 절판되며 많은 애서가들이 헌책방을 찾아다녔다는 후문은 ‘밥’을 향한 작가의 철학적 깊이를 헤아리기에 충분하다.
작가는 대한민국의 보편적 서민 음식이며, 거리의 음식으로 대표되는 라면을 소재로 특유의 필력을 뽐낸다. 수필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 어떤 철학서나 인문서보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21세기 대한민국 먹거리의 현주소를 이야기한다. 인간이 편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자연에 저질렀던 과오들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에게 되돌아오고 있는지 경고한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글을 보며 거대한 서사시 같다고 감탄한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내포하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가 깊고 넓어 김훈 작가의 글은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작가의 힘은 깊은 고뇌와 사유의 담금질에서 비롯된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에 있다. 라면을 끓이며는 그 독특한 문체의 근원이 어디인가 하는 의문을 풀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아버지에 대한 쓸쓸하고 덤덤한 회고 속에는 자유로운 영혼의 한 남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공감이 묻어 있으며, 존경과 자부심도 한껏 드러나 있다.
세월호 사건을 마주하는 문학인의 자세, 대한민국의 독보적인 성별로 분류되는 아줌마를 향한 측은함과 묵직한 당부 역시 단단하고, 통쾌하다. 거기에 여성들의 노출, 화장, 성형을 바라보는 70대 노작가의 시선이 음탕하지 않은 세밀함으로 묘사돼 더욱 유쾌하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현상과 관계, 사물들을 아름다운 언어로 일깨워주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
이제 우리 모두가 다시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다.(김훈 지음, 문학동네, 412쪽, 1만5000원)
하지선 < 강릉 명주교육도서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