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호주 영화 ‘프리실라’ 때문이었다. ‘매드 맥스’ 같은 영화도 좋았지만, ‘프리실라’는 자유스러운 상상력의 극치를 달린다. 영화는 드랙 퀸, 즉 여장 남자 셋이 프리실라라고 이름 지은 고물 버스를 타고, 호주 오지인 사막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프리실라’에서 남자들은 하이힐과 치마를 입고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여자들은 운동복을 입고 강철 체력으로 호주 대륙 횡단에 나선다. 벽화 속 예수는 흑인이며, 슬리퍼로 옷도 해 입는다. 영화를 보고 나니 호주에 가면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즉흥적으로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랐다. 원래는 골드코스트가 있는 북쪽으로 가볼까 했지만, 시드니 북쪽인 뉴캐슬에 도착하니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일기예보를 보니 당분간 북쪽은 날이 갤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와중에 호텔에 비치된 신문에서 한 편의 천국 같은 풍경을 우연히 발견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호주 사람들은 다 안다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였다. 이전엔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멜버른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우선 시드니 구경에 나섰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거대한 조개 껍데기를 연상시켰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이곳은 음악당 이상의 호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덴마크 건축가 예른 웃손(Jorn Utzon)의 작품이다. 바다를 품은 공간 해석력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그에 비해 동대문 DDP는 건물과 주변 환경이 완전히 유리돼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 흥미로운 것은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가 호주 건축가를 선택하라는 대중의 압력을 거절하고, 덴마크 건축가 웃손의 기획을 받아들인 것이다. 심지어 건축비용의 한도도 정하지 않고 말이다.
가까이 가보니 그 조개껍데기 같은 흰색 지붕은 독특한 자개 빛의 세라믹 타일들을 한 장 한 장 얹어 놓은 것이었다. 햇빛을 받으면 타일들은 영롱하게 반짝이며 시드니 항구를 빛낸다. 내부로 들어가면 오페라 하우스의 꼭대기까지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올라가면 시드니의 또 다른 명물 하버 브리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으로 보면 그냥 오페라 하우스만 있는 것 같지만, 하버 브리지와 시드니 항구가 같이 모여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시드니가 세계 3대 미항인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멜버른 쪽으로 무조건 운전해 내려갔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서 신경이 곤두섰다. 가는 길에 ‘호주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블루마운틴에 들렀다. 실제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그랜드 캐니언보다 크기는 작지만 5억년이라는 위대한 시간이 조각한 자연의 모습은 웅대하고 거침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랜드 캐니언과 다른 점은 계곡에서 폭포가 흘러나오고, 유칼립투스 나무가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블루마운틴이란 이름도 유칼립투스가 뿜어내는 유액과 수증기가 합쳐져 안개를 만들고, 이 안개가 햇빛에 반사돼 푸른 빛을 띠기 때문이다.
블루마운틴에는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궤도 열차(경사 52도)가 있다. 궤도열차를 타면 손님을 절벽 밑 바닥까지 단숨에 실어나른다. 1880년대 탄광이던 이곳에 지금은 자연 공원과 산책로가 만들어져 무성한 숲길을 걸으며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
호주의 거의 모든 관광지는 자연을 변형시키지 않고 원형대로 보전하면서 그 안에 건축물까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이러다 보니 적잖이 우스운 일도 벌어졌다. 북반구의 동물원처럼 동물을 좁은 공간에 가두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너른 초지에서 동물을 방목하거나, 동물을 보려면 인간이 자연에 접근해야 한다. 동물원에는 코알라보다 코알라를 보러 온 관광객의 수가 더 많은 것 같았다. 막상 코알라는 나무 위에서 쿨쿨 잠만 자는데 말이다.
펭귄도 마찬가지였다. 필립 아일랜드에서 펭귄 퍼레이드를 한다고 해서, 오후 7시부터 해안가에서 덜덜 떨며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펭귄들을 기다렸다. 펭귄이 지나가는 길목 옆에 계단을 만들고 사람들이 층층이 앉아 있었다. 펭귄 퍼레이드라고 하니 수백마리의 펭귄 행렬이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림 안내판에도 펭귄이 가득했다. 막상 해안가에는 스무 마리도 안 되는 펭귄이 하나둘씩 바다에서 나왔다. 날은 어둡고 펭귄무리는 작고, 펭귄이 놀랄까봐 큰 소리도 못 내고 게다가 춥고 배도 고팠다.
호주는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는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자연보호가 슬로건이 아니라 일상인 나라. 그런데 촛불 켜고 광장에서 100만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는 한국에서 살다 보니, 호주의 자연스러움이 때론 덜 역동적이고 심지어 심심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 속에 사람 빼고 있을 건 다 있는 나라. 호주의 시간은 북반구와 거꾸로 갈 뿐 아니라, 적당히 느리기까지 한 것 같았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다음주에 캔버라와 멜버른 그레이트 오션 로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