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숲·나무 그리고 원령공주의 섬…태초의 지구를 소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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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영화로 떠나는 여행 - '태초의 풍광'일본 야쿠시마
파도소리가 섬을 흔들어 놓는다. 섬 안에는 산이 있고 산은 마치 태초의 숲처럼 나무가 우거졌다. 송일곤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간의 숲>을 보고 그 배경지인 일본 남부 가고시마현에 있는 야쿠시마에 가고 싶어졌다. 원시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초록 천지의 안개 바다, 나무와 이끼들이 시간을 되돌려 오래된 지구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시간의 바다를 만나고 싶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수많은 신을 모시고 산다. 인형도 오래되면 사람이 되기도 하고 고양이도 귀신이 된다. 심지어 신에게 나이까지 선물받는다. 이곳 야쿠시마에서는 나무가 신이다. 특히 1000년 이상 묵은 삼나무를 야쿠스기(鹿兒杉)라 부른다. 특별한 나무에는 스기란 이름이 뒤에 붙어져 있다. 붓다스기, 후타고스키, 센넨스기 등 각각 제 이름을 가진 삼나무들이 있고, 조몬스기를 향해가는 숲에도 대왕 삼나무, 부부 삼나무, 삼대 삼나무, 윌슨 그루터기 등이 있다. 발견자의 이름을 딴 월슨 스기는 그루터기 안에서 하늘 올려다보면 마치 하트 모양으로 생겨서 유명해졌다. 이 나무의 수령은 3000년인데, 아쉽게 밑동은 잘렸어도 안에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섬에는 2000그루가 넘는 야쿠스기가 있다. 섬 사람들은 엄청난 크기의 삼나무 단면을 잘라 통째로 책상을 만들거나 문을 달거나 벤치를 만들어 쓴다. 지금은 벌목이 금지돼 있지만 예전에는 수천 그루의 나무를 잘라 쌀과 바꾸고 일상적인 가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나무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나무, 7200년 된 조몬스기라는 삼나무를 보러 새벽부터 서둘렀다. 아라카와 산 정상 밑 해발 고도 1300m에 있는 이 특별한 나무를 보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지참하고 5시에 운행하는 첫 버스를 타야 한다.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산행을 다 마치면 어둑어둑 해가 지기 때문이다. 처음엔 삼삼오오 이야기도 하며 산을 걷지만 결국 모두 입을 다물고 걷기만을 반복한다. 등산부 초입부터 절반은 모두 과거 삼나무를 벌채해 운반하기 위한 기찻길로 이뤄져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아무리 고생스럽게 찾아왔다 해도 조몬스기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달에 35일 비가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쿠시마에서는 비와 안개, 수시로 변화하는 날씨 때문에 조몬스기를 못 보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시간의 숲>의 주인공인 배우 박용우 씨가 조몬스기를 보지 못하자 현지 가이드는 “마음을 주면 작은 나무도 조몬스기가 될 수 있다”며 “사람 마음이 변하는 것이지 조몬스기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고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조몬스기는 보기 어렵다. 어쩌면 전생의 선업을 쌓아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숲에 들어오면 나무가 사람이고 사람이 나무인 것처럼 느껴진다. 평생 봐도 못 볼 다양한 나무를 만나게 된다. 나무들 간 가지가 연결돼 부부처럼 서로가 한몸이 된 연리지 나무, 다른 나무를 착취해서 사는 기생 나무, 마녀의 머리카락처럼 거대하게 지상 위로 뿌리가 노출된 나무, 조몬스기는 아니지만 그 크기와 위풍당당함 때문에 대왕삼나무라 불리는 나무. 나무뿌리가 사람들이 건널 수 있는 터널이 되고, 다리가 됐다. 그렇게 장장 5시간 이상을 걷자 마침내 조몬스기가 나타났다.
크긴 했지만 조몬스기는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았다. 이미 미국 캘리포니아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인 제너럴 셔먼을 보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오히려 조몬스기는 그 생존 방식이 캘리포니아 인요(Inyo)국유림에 있는 수령 4600살의 ‘므두셀라(Methuselah)’라 불리는 히코리 소나무와 비슷하다. 성서에서 969살까지 살았던 노아의 할아버지 이름인 므두셀라 나무는 척박한 토양에서 아주 적게 자란다. 1년에 0.1㎜씩 자라서 양분과 수분을 실어나르는 데 부담을 주지 않는다. 7200년 된 조몬스기 앞에 서 보니 내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조몬스기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 오래 견뎌낼 수 있었으리라. 나무는 내게 많은 것을 내려놓으라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야쿠시마에서는 산의 공주 야마히메를 만나 먼저 웃지 않으면, 영혼을 뺏긴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다음날 또 다른 산의 공주,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를 만나러 그 배경지인 시라타니운스이코(白谷雲水峽) 계곡에 산행을 갔다. 조몬스기 트레킹에 비하면 산행은 훨씬 짧지만, 배경의 강렬함은 더 했다. ‘야쿠시마에는 ‘사람 2만명, 사슴 2만마리, 원숭이 2만마리’라는 노래가 불리고, 원령공주에서는 사슴신을 설정할 만큼 온통 사슴 천지, 원숭이 천지이다. 짐승들은 사람을 보아도 태연하게 자기 갈 길을 간다. 사슴과 원숭이, 흰색 포말을 내뿜 는 계곡, 나무 사이에 새어 들어오는 빛을 쫓아 위로 위로 올라가다 보면, 문득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풍광들을 만나게 된다.
돌과 나무와 길 모두 겹겹이 이끼의 옷을 입고 엉켜 있는 이곳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 숲에서 영감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그 배경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 신비로운 숲은 하야오가 평생 추구했던 장대하고 스펙터클한 생태학적 신화와 완벽히 맞아 떨어져 있었다. 숲의 정령 고다마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나무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적인 존재론이 서려 있는 듯싶다.
숲은 광대했고 고요했다. 그 적막함 속에서 태초의 지구를 소환해 본다. 몸과 마음에 다시 물기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문득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인간의 일원인 나를 포용해 주는 태초의 숲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야쿠시마의 숲은 ‘지구 어머니’가 낳아준 가장 선한 아이들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수많은 신을 모시고 산다. 인형도 오래되면 사람이 되기도 하고 고양이도 귀신이 된다. 심지어 신에게 나이까지 선물받는다. 이곳 야쿠시마에서는 나무가 신이다. 특히 1000년 이상 묵은 삼나무를 야쿠스기(鹿兒杉)라 부른다. 특별한 나무에는 스기란 이름이 뒤에 붙어져 있다. 붓다스기, 후타고스키, 센넨스기 등 각각 제 이름을 가진 삼나무들이 있고, 조몬스기를 향해가는 숲에도 대왕 삼나무, 부부 삼나무, 삼대 삼나무, 윌슨 그루터기 등이 있다. 발견자의 이름을 딴 월슨 스기는 그루터기 안에서 하늘 올려다보면 마치 하트 모양으로 생겨서 유명해졌다. 이 나무의 수령은 3000년인데, 아쉽게 밑동은 잘렸어도 안에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섬에는 2000그루가 넘는 야쿠스기가 있다. 섬 사람들은 엄청난 크기의 삼나무 단면을 잘라 통째로 책상을 만들거나 문을 달거나 벤치를 만들어 쓴다. 지금은 벌목이 금지돼 있지만 예전에는 수천 그루의 나무를 잘라 쌀과 바꾸고 일상적인 가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나무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나무, 7200년 된 조몬스기라는 삼나무를 보러 새벽부터 서둘렀다. 아라카와 산 정상 밑 해발 고도 1300m에 있는 이 특별한 나무를 보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지참하고 5시에 운행하는 첫 버스를 타야 한다.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산행을 다 마치면 어둑어둑 해가 지기 때문이다. 처음엔 삼삼오오 이야기도 하며 산을 걷지만 결국 모두 입을 다물고 걷기만을 반복한다. 등산부 초입부터 절반은 모두 과거 삼나무를 벌채해 운반하기 위한 기찻길로 이뤄져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아무리 고생스럽게 찾아왔다 해도 조몬스기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달에 35일 비가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쿠시마에서는 비와 안개, 수시로 변화하는 날씨 때문에 조몬스기를 못 보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시간의 숲>의 주인공인 배우 박용우 씨가 조몬스기를 보지 못하자 현지 가이드는 “마음을 주면 작은 나무도 조몬스기가 될 수 있다”며 “사람 마음이 변하는 것이지 조몬스기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고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조몬스기는 보기 어렵다. 어쩌면 전생의 선업을 쌓아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숲에 들어오면 나무가 사람이고 사람이 나무인 것처럼 느껴진다. 평생 봐도 못 볼 다양한 나무를 만나게 된다. 나무들 간 가지가 연결돼 부부처럼 서로가 한몸이 된 연리지 나무, 다른 나무를 착취해서 사는 기생 나무, 마녀의 머리카락처럼 거대하게 지상 위로 뿌리가 노출된 나무, 조몬스기는 아니지만 그 크기와 위풍당당함 때문에 대왕삼나무라 불리는 나무. 나무뿌리가 사람들이 건널 수 있는 터널이 되고, 다리가 됐다. 그렇게 장장 5시간 이상을 걷자 마침내 조몬스기가 나타났다.
크긴 했지만 조몬스기는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았다. 이미 미국 캘리포니아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인 제너럴 셔먼을 보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오히려 조몬스기는 그 생존 방식이 캘리포니아 인요(Inyo)국유림에 있는 수령 4600살의 ‘므두셀라(Methuselah)’라 불리는 히코리 소나무와 비슷하다. 성서에서 969살까지 살았던 노아의 할아버지 이름인 므두셀라 나무는 척박한 토양에서 아주 적게 자란다. 1년에 0.1㎜씩 자라서 양분과 수분을 실어나르는 데 부담을 주지 않는다. 7200년 된 조몬스기 앞에 서 보니 내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조몬스기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 오래 견뎌낼 수 있었으리라. 나무는 내게 많은 것을 내려놓으라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야쿠시마에서는 산의 공주 야마히메를 만나 먼저 웃지 않으면, 영혼을 뺏긴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다음날 또 다른 산의 공주,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를 만나러 그 배경지인 시라타니운스이코(白谷雲水峽) 계곡에 산행을 갔다. 조몬스기 트레킹에 비하면 산행은 훨씬 짧지만, 배경의 강렬함은 더 했다. ‘야쿠시마에는 ‘사람 2만명, 사슴 2만마리, 원숭이 2만마리’라는 노래가 불리고, 원령공주에서는 사슴신을 설정할 만큼 온통 사슴 천지, 원숭이 천지이다. 짐승들은 사람을 보아도 태연하게 자기 갈 길을 간다. 사슴과 원숭이, 흰색 포말을 내뿜 는 계곡, 나무 사이에 새어 들어오는 빛을 쫓아 위로 위로 올라가다 보면, 문득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풍광들을 만나게 된다.
돌과 나무와 길 모두 겹겹이 이끼의 옷을 입고 엉켜 있는 이곳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 숲에서 영감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그 배경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 신비로운 숲은 하야오가 평생 추구했던 장대하고 스펙터클한 생태학적 신화와 완벽히 맞아 떨어져 있었다. 숲의 정령 고다마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나무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적인 존재론이 서려 있는 듯싶다.
숲은 광대했고 고요했다. 그 적막함 속에서 태초의 지구를 소환해 본다. 몸과 마음에 다시 물기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문득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인간의 일원인 나를 포용해 주는 태초의 숲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야쿠시마의 숲은 ‘지구 어머니’가 낳아준 가장 선한 아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