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세비야, 상상했던 모든 스페인과 만난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플라멩코·투우…'정열의 도시' 스페인 세비야
좁은 산타크루즈 골목을 지나다보면 문득 카르멘이 나타날 것 같아…
해질녘, 타파스 바의 틴토 한잔은 플라멩코 무희의 넘실대는 몸짓을 닮아
좁은 산타크루즈 골목을 지나다보면 문득 카르멘이 나타날 것 같아…
해질녘, 타파스 바의 틴토 한잔은 플라멩코 무희의 넘실대는 몸짓을 닮아
모스크 위에 올려진 거대한 성당
스페인 남쪽 끝, 지브롤터 해협 너머 모로코를 마주하는 곳에 자리 잡은 안달루시아. 800년간 이어진 아랍의 지배를 거쳐 대항해 시대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에서 가장 화려한 문화와 영광을 꽃피운 대지. 가장 이국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스페인다운 토양을 지닌 이 땅의 중심에 세비야가 있다. 세비야의 또 다른 말이 정열이라고 했던가. 이를 방증하듯 세비야의 태양은 계절을 잊은 채 여전히 뜨겁게 타오른다. 경쾌한 마차의 말발굽 소리를 쫓아 콘스투티시온 대로를 걷는다. 얼마 되지 않아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도시의 상징인 세비야 대성당이다. 유럽에 성당만큼 흔한 것이 없다지만 세비야 대성당은 특별하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사원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성당 건립 당시 규모에 놀란 이들이 ‘미친자들의 작품’이라며 혀를 내둘렀겠는가.
그러나 여왕 사망 후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그는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이후 여러 곳을 떠돌던 콜럼버스의 유해는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그의 유언대로 땅속이 아니라 공중에 들린 채로 말이다.
세비야 성당은 고딕양식을 기반으로 지어졌지만, 곳곳에서 모스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아랍인들이 세운 회교사원을 허물고 그 위에 지은 까닭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렌지 뜰이라 불리는 이슬람식 정원과 히랄다(Giralda) 탑이다. 풍향계란 의미의 히랄다 탑은 본래 미나렛(첨탑)이었으나 돔을 떼어내고 28개의 종루를 달아 성당의 종탑으로 개조됐다. 히랄다 탑의 진가는 꼭대기에 올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계단 없이 경사면으로만 이어진 길을 따라 34층 정상에 올라서면 도시 최고의 전망이 눈앞에 펼쳐진다. 과달비르크 강을 따라 여유롭게 흐르는 세비야의 삶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스페인 예술의 꽃, 플라멩코
집시의 한과 슬픔이 응축된 음악
플라멩코는 흔히 집시의 음악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집시 민족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플라멩코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시만의 음악이라고 한다면 곤란하다. 이베리아 반도에 집시가 처음으로 이주한 것은 15세기경. 인도 라자스탄을 떠나 유럽의 끝까지 건너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환영이 아니라 핍박과 냉대였다. 그러나 이 땅에서 비참했던 것은 비단 집시 민족뿐만이 아니었다. 그라나다를 마지막으로 아랍 왕조가 무너지면서 무어인들은 800년 동안 빚어온 삶의 터전을 잃었다. 유대인들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톨릭 왕조의 탄압을 피해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동굴에 숨어서 견뎌내는 것뿐. 그들은 절망으로 울부짖고, 땅을 구르며 증오와 갈망을 표현하고, 팔을 휘저으며 고통을 이겨냈다. 그러니까 플라멩코는 이 땅에서 설움에 몸부림쳤던 민족들의 슬픔과 각자의 문화, 그리고 안달루시아의 토착문화가 융합된 결정체인 셈이다. 진정한 플라멩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안달루시아 대지의 귀신인 ‘두엔데’를 넣어야 한다고 한다. 정확히 두엔데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이는 없지만, 무엇인지는 느낄 수 있다. 우리네 정서인 ‘한’을 딱히 설명할 길이 없지만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세비아=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여행팁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