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인사 파괴'…스타트업처럼 연공·격식 없애
1993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과 함께 신인사 제도를 도입했다. 7·4제(아침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 퇴근하는 제도)와 발탁인사제, 능력급제 확대 등이 이뤄졌고 이는 삼성 약진의 밑바탕이 됐다. 23년이 흐른 지금 삼성전자가 또 한 번의 인사 혁신에 나섰다. 직급을 줄여 인사에서 연공서열적 요소를 없애고, 호칭도 ‘OOO님’으로 바꿔 창의적 기업문화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성장 시대, 인사 적체로 느려진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창의의 대명사인 구글과 애플을 따라잡겠다는 의도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끄는 혁신이 인사제도 개혁을 통해 본격화한다는 의미도 있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가 23년간 유지해온 인사제도를 바꾸기로 함에 따라 다른 기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삼성의 '인사 파괴'…스타트업처럼 연공·격식 없애
직급 의미 없어지고 능력 위주 인사

“구글은 중요한 일도 엔지니어-상무(VP)-최고경영자(CEO) 등 3단계를 거쳐 의사결정을 한다. 우린 다르다. 대여섯 단계가 있다 보니 일선 직원의 아이디어가 사업부장(사장)에게 전달되려면 한 달 이상 걸린다. 그것도 중간에서 차단되기 일쑤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이런 복잡한 직급 체계에서 나오는 비효율을 없애기 위해 삼성전자는 사원에서 부장까지 5단계로 이뤄진 직급을 4단계로 단순화하기로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창의적이고 수평적 조직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연공서열 중심 인사제도를 직무·역할 중심으로 개편하는 것”이라며 “의사결정 구조가 단순해져 효율성과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급 체계가 줄면 능력 있는 젊은 직원들이 그룹장과 팀장 등으로 쉽게 발탁될 수 있다. 또 이들에겐 능력에 맞는 급여를 주기 위해 연봉제에서도 때가 되면 오르는 연공서열적 요소를 최소화한다.

호칭도 미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처럼 수평적으로 ‘OOO님’으로 부른다. 창의적 아이디어가 쉽게 나오게 하기 위해서다.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인 삼성이 ‘퍼스트 무버’(선도자)가 되려면 상명하복식의 경직된 기업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게 이 부회장의 생각이다.

‘이재용 시대’ 신호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임직원의 업무 몰입도를 높이고 글로벌 인재가 일하러 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안도 대거 포함됐다. 업무 몰입도란 직원들이 업무에 집중하는 정도로 사업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다. 한국 기업의 업무 몰입도는 미국 등 세계적 기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를 높이기 위해 먼저 회의를 효율화한다. 꼭 필요한 인원만 참석해 모두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게 한다. 시간은 최대 1시간 이내로 하며, 결론을 도출하고 이를 지킬 것을 ‘회의 권장사항’으로 정했다. 보고는 보고받을 사람을 직급별로 차례로 거치기보다 이들에게 한 번에 보고하는 ‘동시 보고’를 활성화한다. 또 형식보다는 핵심 내용만 전달하도록 할 계획이다. 상사 눈치를 보며 오래 회사에 남아있거나 주말에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잔업, 휴일 특근은 지난해의 50% 이하로만 허용한다. 그 이상 야근하거나 휴일에 출근하면 인사상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다.

또 임원에겐 1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쉴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동안 임원은 토요일엔 오전에 출근해 회의하고, 일요일엔 오후에 회사에 나와 월요일 업무를 준비하는 사례가 많았다. 직원들은 연간 휴가계획을 미리 세우고, 매년 15일 이상 연차를 무조건 쓰도록 했다. 또 올여름부터는 임직원 편의를 위해 사무실에서 반바지도 입을 수 있도록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휴가 잔업 등 일하는 방식이 자유로워야 고용 브랜드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경직적 근로문화 탓에 해외에서 인재를 뽑아도 2~3년 만에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 고민해왔다.

인사를 통해 기업문화를 바꾸려는 이런 노력엔 이 부회장의 뜻이 반영됐다. 40대 경영자로 해외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이 부회장은 글로벌 마인드와 창의적 기업문화를 강조해왔다. 그는 올해 초 미국 실리콘밸리 현지법인을 찾아 “현지 기업처럼 사장과 임원 집무실을 없앨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