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탄 만으로는 제조 못 해…석공 생산 석탄 비중 58%
1986년부터 소비 감소·현재는 사랑과 나눔 상징물로 거듭나


'서민 연료' 연탄 운명은 어떻게 될까.

석탄공사 폐업설로 연탄 앞날이 관심이다.

수입석탄만으로는 연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석탄공사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수입석탄 혼합률이 15%를 넘으면 쉽게 부서져 연탄으로서 역할을 못 한다"라고 말했다.

연탄 재료 대부분이 국내산 석탄이라는 뜻이다.

석탄공사는 연탄용(민수용) 석탄 공급 비중이 높다.

2015년 한해 국내 연탄용 석탄 수요량은 148만3천t이다.

이 중 85만5천t이 석탄공사 생산 석탄이다.

공급 비중이 절반을 넘는 58%다.

같은 기간 태백 장성, 삼척 도계, 전남 화순 등 석탄공사 3개 탄광 총 석탄생산량 102만2천t의 84%다.

원통 모양 연탄은 1920년대 말 일본에서 들어왔다.

본격 제조는 1930년대 부산에서 시작됐다.

일부 가정은 석탄에 흙, 물을 섞어 틀에 넣은 다음 나무망치로 쳐서 만들기도 했다.

부산 연탄은 휴전 이후 피난민에 의해 전국으로 알려졌다.

본격 확산은 문경선(1955년), 영암선(1956년), 함백선(1957년) 등 석탄산업철도 개통으로 전국에 석탄 공급이 원활해진 이후다.

정부도 1957년 11월 임산물(장작) 반입 금지를 지시하는 등 권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당시 가정용 연료 대부분이 장작이었다.

우리나라 재래식 온돌은 초창기 연탄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존 아궁이에 화덕을 넣으면 연탄 난방이 가능했다.

1966년 12월 석공기술연구소 발표 '5인 가족 기준 연료비'를 보면 연탄이 가장 저렴했다.

하루분 연료비를 연탄 1로 했을 경우 전기 15, 경유 2.8, 석유 2.1 등으로 나타났다.

연탄이 서민 연료로 등장한 것이다.

이어 1970년대 온수 보일러(새마을 보일러)와 1980년대 가스 배출기가 각각 나오면서 사용가구도 급증했다.

연탄은 구멍 수에 따라 15공탄, 19공탄, 22공탄 등으로 구분된다.

현재 가정용 연탄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22공탄은 1973년 8월 무게 3.6㎏으로 규격화됐다.

연탄은 1986년부터 퇴장하기 시작했다.

유가 안정, 국민소득 증가, 대단위 아파트 건설, 서울 올림픽 개최에 따른 환경규제 강화 등 국내외 에너지 환경 변화 영향이다.

대한석탄협회 자료를 보면 민수용 석탄 소비량도 1986년 2천425만1천t이 최대였다.

석탄 소비량 10t 중 9t이 민수용이었다.

같은 해 석탄공사는 생산량 517만t 중 91%인 471만9천t을 민수용으로 공급했다.

민수용 소비량은 1986년을 정점으로 1993년 774만7천t, 2005년 201만t 등으로 매년 급감했다.

연탄이 다시 주목받은 계기는 2008년 9월 리먼 사태다.

리먼 사태로 세계 경제가 출렁거렸고,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다.

경제난은 사랑과 나눔 실천 운동으로 이어졌다.

연탄이 겨울을 앞두고 저소득층 등 어려운 이웃에게 전하는 온정의 상징물로 거듭난 것이다.

실제로 2007년 209만1천t이던 민수용 석탄 소비량이 2008년 228만9천t으로 반짝 증가했다.

원기준 광산지역사회연구소장은 3일 "우리나라에서 석탄은 곧 연탄이고, 연탄이 곧 석탄"이라며 "그 정도로 연탄은 연료 이상의 애환과 추억이 있는 묵직한 존재"라고 말했다.

이어 "에너지 환경 변화 등으로 퇴장 위기를 맞았지만, 아직도 연탄을 사용하는 국민이 15만 가구가 넘는다"라며 "특히 이들 상당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태백·삼척연합뉴스) 배연호 기자 by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