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퍼팅의 달인 시각장애인 골퍼 조인찬
시각장애인골프 강자로
30·40대때 양쪽 눈 모두 실명…좌절·방황하다 다시 골프 시작
3대 메이저 제패…세계 6위로
골프는 마음으로 하는 운동
어프로치·퍼팅이 잘 안되는 건 보이는 사물의 간섭·혼란 때문
한번 정하면 주저없이 스윙을
◆정상인에서 1급 시각장애인으로
1988년. 서른다섯 살에 그는 오른쪽 시력을 잃었다. 인천에서 산업용 가스를 제조해 대기업에 납품해 적지 않은 돈을 벌던 때였다. ‘왜 하필 나에게!’ 분노가 치밀었고 절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한쪽 눈으로도 스키를 타고 골프를 칠 만큼 적응했다. 골프 실력도 오히려 이때 일취월장했다. 2오버까지 쳤다. 아쉬운 게 없었다. 2000년 멀쩡하던 왼쪽 눈마저 잃기 전까진 그랬다.
미국과 러시아까지 날아가 고치려 했지만 ‘치료가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 망막 시세포가 원인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가는 황반변성. 주변 시력만 남고 중심 시력은 모두 사라졌다. 사업을 접고 골프채도 버렸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밖으로 나가면 어딘가에 올라가 뛰어내릴 궁리만 했다.
“장애인복지관에 가서 시각장애인과 어울리고 당뇨환자들을 위한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하면서 평온을 찾았습니다. 나보다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장애를 받아들인 거죠.”
점자를 공부하고 지팡이 짚는 법을 배우면서 ‘장애인으로 사는 법’을 익혀나갔다. 골프채를 다시 잡기 시작한 건 2007년. 국내 최초로 시각장애인 골프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한번 해보자’는 목표가 생겼다. 보이지 않는 공을 때리는 ‘특별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는 “정타를 때렸을 때 온몸에 전해오는 손맛은 시력을 잃기 전보다 더 강렬했다”고 말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연습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2008년엔 처음 출전한 호주오픈을 제패하는 ‘사고’를 쳤다. 1라운드 85타, 2라운드 102타를 쳤다. 2012년 캐나다오픈까지 제패하며 시각장애인 골프계의 세계적 강자로 떠올랐다. 지난해에는 US오픈에서 네트스코어(실제 스코어에서 핸디캡 스코어를 뺀 점수) 7언더파로 또다시 왕좌에 올랐다. 세계랭킹이 6위까지 올라갔다.
◆“눈을 감으면 다른 감각 살아나”
시력을 잃었지만 얻은 게 더 많다고 했다. 공을 볼 일이 없으니 ‘헤드업’ 할 일도 없다. 미스샷이 줄었다. 청각과 발바닥, 손가락 감각이 두 배는 섬세해졌다.
“공이 클럽 헤드에 맞는 소리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거리와 온그린 여부를 알아맞힐 수 있는 시각장애인 골퍼가 꽤 많습니다. 후천적으로도 집중하면 누구나 감각을 키울 수 있다는 얘기죠.”
퍼팅은 그의 장기다. 그린에 올라가면 발바닥으로 천천히 홀컵 주변 경사를 읽는다. 서포터가 퍼팅할 방향을 잡아주고 거리를 일러주면 기억해둔 경사 감각을 결합시켜 스트로크를 한다. 공이 홀컵을 크게 벗어나는 일은 드물다. 그는 캐나다오픈에서 18홀 최저퍼트수(27회)를 기록했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챔피언 수준의 퍼팅 실력이다.
“그린에 올라가면 눈을 감고 발바닥 감각으로 경사를 느끼려는 연습을 자주 해보세요. 시간이 갈수록 시각보다 더 정확해질 겁니다. 눈 감고 퍼팅하는 연습은 물론 큰 도움이 됩니다.”
70m 이내의 어프로치도 자신 있는 샷 중 하나다. 그는 기계적으로 쇼트 아이언 스윙을 한다. 50m는 하프 스윙, 70m는 풀 스윙, 이런 식이다. 거리에 맞춰 미리 정해둔 크기로 백스윙한 뒤 주저없이 다운스윙을 한다.
“어프로치 실수는 대부분 보이는 것으로 인한 간섭 때문입니다. 처음 느끼고 결정한 스윙대로 지체 없이 하면 성공률이 더 높은데 갑자기 러프나 공, 잔디결 등이 눈에 들어오면서 심리적 불안이 생기고 미스샷이 나는 것이죠. 저도 시력을 잃기 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한번 정한 스윙을 주저하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커리어그랜드슬램 목표
그는 오는 7월 야심찬 도전에 나선다. 영국에서 열리는 브리티시오픈 제패가 목표다. 시각장애인 골퍼로는 첫 커리어그랜드슬램(생애 통산 4대 메이저 석권)이란 대기록을 눈앞에 둔 셈이다. 2020년에는 올림픽에도 시각장애인 골프 종목이 신설된다. 금메달은 또 다른 목표다.
그는 얼마 전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 산악 오지나 경치가 수려한 관광지에 친환경 케이블카를 놓는 사업이다. 정상인으로 절반을 살았고, 장애인으로 절반을 살아온 그의 비즈니스 철학이 궁금했다. “기다림인 것 같아요. 사업이든 골프든 급하게 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그에겐 마지막 소원이 있다. 시력을 되찾는 것이다. 꼭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서다. “어린 손자가 하나 있는데, 시력을 잃었을 때 태어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요. 딱 한 번만 볼 수 있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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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