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서 추방되고 남한에선 외면받고…'카레이스키' 변월룡의 미술인생
국내 화단에서 이름이 낯선 변월룡 화백(1916~1990·사진)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던 한인의 후손으로 태어나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한 ‘카레이스키’(옛 소련 고려인) 미술인이다. 한민족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러시아 최고 미술교육기관인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회화·조각·건축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35년 동안 이 대학 교수로 일하며 일생을 보냈다.

1953년 소련·북한 간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미술대 학장을 맡았던 그는 주체미술로 변질되기 전 북한 미술교육 체제의 기초를 놓았다. 1954년 아내의 간청으로 잠시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복잡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휘말려 북한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변월룡 화백의 1953년작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 송환’.
변월룡 화백의 1953년작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 송환’.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변 화백의 작품 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오는 5월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연중 기획전으로 마련한 ‘백년의 신화-한국 근대미술 거장전’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다. 변 화백이 러시아 화단에서 활동했던 학창시절부터 1980년대까지 일기를 쓰듯 작업한 유화, 석판화, 드로잉 등 200여점을 걸었다. ‘자화상’ ‘어머니’ ‘무용가 최승희 초상’ ‘금강산 소나무’ 등이 눈길을 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제작한 반전(反戰) 포스터, 북한출장 보고서 초안은 처음 공개됐다.

러시아 정통 사실주의 화풍을 계승한 변 화백은 일제강점, 분단, 전쟁, 이념 대립 등 한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 세계대전, 냉전, 개혁과 개방을 겪은 러시아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삶과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특히 최승희, 홍명희 등 당대 유명인을 생생하게 그린 초상화는 빈약한 한국 서양미술의 토양을 더욱 풍성하게 가꿨다. 한복을 입고 붉은 부채를 든 최승희의 모습을 그린 1954년작 ‘무용가 최승희 초상’은 샘처럼 솟아나온 붉은 색깔과 몸짓 율동의 하모니를 살려내 리얼리즘 화풍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국땅에서 아픔을 인내하고 살아온 변 화백의 감성을 녹여낸 그림도 여러 점 걸렸다. 1987년에 제작한 ‘금강산 소나무’는 한평생 이방인으로 살면서 외롭고 힘겨웠던 삶을 대변하는 대표작이다. 멀리 금강산에서 홀로 떨어진 큰 소나무를 보랏빛 구름과 함께 그려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그렸다. 나홋카 항의 뒤틀린 소나무를 푸른색 필치로 묘사한 작품은 고국을 향한 열망을 은유적으로 녹여냈다.

변 화백이 1953년 평양에서 작업한 작품들도 관람객을 반긴다. 1953년작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 송환’은 6·25전쟁 중 남과 북에 억류됐던 포로들을 판문점 일대 완충지대에서 교환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개성 선죽교’와 ‘박연 폭포’ ‘금강산 풍경’ ‘판문점 근교 연병장’ 등에서는 한국 근대미술의 다층적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회에 맞춰 서울을 찾은 차남 세르게이 씨는 부친에 대해 “침착하고 조용하고 인자했다”며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상대방과 대화도 많이 했다”고 전했다. (02)2022-0600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