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드라마 뭐 보세요? 워킹데드요? 고마워요.”

미국 뉴욕에서 만난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관계자는 대뜸 최근에 어떤 TV시리즈와 영화를 봤는지 물었다. 현재 여섯 번째 시즌을 방영하고 있는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를 보고 있다는 대답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캐나다연금 가입자들에게 적지만 수익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CPPIB가 작년 9월 엔터테인먼트원의 최대주주가 됐다고 설명했다. 트와일라잇 등 영화 4만여편과 워킹데드 등 TV시리즈의 판권을 보유한 회사다.
[글로벌 투자전쟁] 46조달러 장전한 글로벌 '큰손'…특허·농장·영공통행료까지 '사냥'
◆공공 펀드가 지배하는 세상

연기금 국부펀드 등 공공 펀드의 영향력이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농업 임업 같은 1차산업부터 제조, 정보기술(IT), 물류, 콘텐츠, 제약특허, 금융, 관광, 스포츠까지 업종을 불문하고 투자 영역을 늘리는 추세다. 주식, 채권은 물론 사모펀드, 부동산, 인프라 등 자산의 종류도 가리지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다. 공공 펀드의 숫자와 굴리는 돈의 규모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났는데 금리가 낮아 운용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게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정부와 은행의 위축이다. 금융위기 이후 각국 정부는 재정이 나빠졌고 은행들은 자본 건전성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자산도 내다팔고 있다. 이렇다 보니 자본이 필요한 곳에 돈을 대는 ‘큰손’의 역할을 공공 펀드가 도맡고 있다.

미국 컨설팅회사 타워스왓슨에 따르면 2014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연기금과 국부펀드들이 운용하는 총 자산은 46조달러에 달한다. 2009년 29조1000억달러에 비해 50% 가까이 늘었다.

◆능동적 투자로 영향력 확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공 펀드들은 채권과 주식에 분산 투자하는 수동적인 자산운용을 주로 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될 성 부른 사업이나 자산을 직접 골라 투자하는 능동적 투자자로 돌아섰다. CPPIB는 지난해 중국 최대 은행인 중국우정저축은행에 32억위안(약 5억달러), 홍콩 2위 초고속인터넷업체 HKBN에 2억달러를 각각 투자했다. 미국 GE(제너럴일렉트릭)가 보유했던 인수금융 전문회사 앤터리스도 120억달러에 인수했다.

중국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도 6530억달러에 달하는 ‘실탄’을 무기로 전 세계 기업과 업무용 빌딩, 인프라 자산을 쓸어담고 있다.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우버와 경쟁하는 싱가포르 택시 예약 앱(응용프로그램) 그랩택시에 최근 3억5000만달러를 투자했다. 세계 최대 크루즈업체 카니발과 중국 내 유람선 사업을 위한 합작법인도 설립했다.

◆정부 영역이라도 과감하게

각국 정부가 재정 확충을 위해 내다파는 민영화 자산들도 공공 펀드가 과감히 사들이고 있다. CIC는 이탈리아 정부가 지난해 말 매물로 내놓은 이탈리아 우체국 인수를 추진 중이다.

주권과 관련한 자산이 시장에 나오는 일도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 재정취약국은 항공기가 영공을 지나갈 때 항공사들이 국가에 내는 통행료 수입을 유동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우주도 큰손들의 투자 영토에서 빠지지 않는다. 캐나다공무원연금(PSP)은 통신용 인공위성을 운영하는 텔샛의 최대주주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이른바 ‘트로피 자산’(해당 지역의 상징적인 건축물)도 공공 펀드가 싹쓸이하고 있다. 기대수익률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시장에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서다. 뉴욕을 상징하는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을 중국 안방보험이 지난해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카타르 국부펀드인 카타르투자청은 프랑스 프로축구팀 파리 생제르맹을 지난해 인수했다. 온타리오교원연금(OTTP)은 프로아이스하키팀 토론토 메이플리프스의 대주주다.

뉴욕=유창재 / 홍콩=안상미 기자 yoocool@hankyung.com

증권부 특별취재팀 이건호 차장(팀장), 샌프란시스코=고경봉 차장, 뉴욕=유창재 기자, 런던·암스테르담·밀라노=좌동욱 기자, 홍콩·싱가포르=안상미 기자, 도쿄=이현진 기자/염지원 ASK사무국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