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무늬 벗고 꽃단장…'회춘'한 159년 버버리
1856년 창립해 영국을 상징하는 명품 브랜드로 자리잡은 버버리. 1990년대는 버버리에 시련의 시기였다. 지나친 대중화로 명품 브랜드로서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고, 할아버지 세대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디자인은 젊은 소비자를 떠나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믿었던 아시아 시장에서도 매출이 급락했다. 1997년 버버리의 순이익은 250만파운드로 전년(620만파운드)보다 60% 가까이 급감했다.

체크무늬 벗고 꽃단장…'회춘'한 159년 버버리
버버리를 되살린 건 두 명의 미국인 여성 최고경영자(CEO)다. 1997~2005년 버버리를 이끈 로즈 마리 브라보와 2006~2014년 버버리 CEO였던 앤젤라 아렌츠다. 브랜드 생명이 거의 끝날 지경에 이르렀던 버버리가 다시 고급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회복하기까지의 과정은 어떻게 브랜드를 관리해야 하는지 기업 경영자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브랜드 관리 실패로 명품 이미지 훼손

버버리는 1856년 21세의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햄프셔 지방에 설립한 의류 전문점에서 시작했다. 버버리는 1880년 질기면서도 방수 기능이 있고 통풍이 잘 되는 개버딘 천을 개발해 1888년 특허를 땄다. 개버딘 천의 우수성 때문에 1914년 세계 최초로 남극 대륙을 횡단한 어니스트 섀클턴이 버버리를 입었다. ‘버버리 코트’라 불리는 유명한 트렌치 코트는 처음엔 영국군 장교를 위해 제작했지만 전쟁 이후 일반인에게 널리 퍼지며 인기를 끌었다. 1924년 버버리 격자무늬를 코트 안감에 사용하면서 지금의 버버리 코트가 완성됐다. 영국 왕실에서도 애용하면서 버버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100여년이 흐르는 동안 버버리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누적된 문제는 1990년대 들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97년 이전의 버버리는 지금처럼 세계에서 통용되는 단일한 브랜드가 아니었다. 브라보 이전의 경영진은 각국 책임자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버버리 브랜드를 활용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결과 버버리는 브랜드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었다. 소비자들이 버버리를 생각할 때 마음속에 떠올리는 버버리는 나라마다 달랐다. 미국에서 버버리라고 하면 900달러짜리 코트나 200달러짜리 스카프를 뜻했다. 한국에서는 위스키였고, 스위스에선 시계였다. 브라보 CEO는 당시를 회상하며 “라이선스를 남발한 탓에 버버리라는 브랜드를 단 제품들이 너무 많이 퍼져 있었다”고 말했다.

버버리는 누구에게 제품을 팔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몰랐다. 버버리 제품이 아울렛에서 다량으로 판매되면서 품격이 급격이 떨어졌다. ‘차브’라 불리는 영국 노동계급은 자신들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버버리를 입고 다녔고, 영국 유명 백화점인 셀프리지스, 하비니콜스, 해러즈 등은 매장에서 버버리를 취급하지 않는 일도 벌어졌다.
체크무늬 벗고 꽃단장…'회춘'한 159년 버버리
버버리 무늬 비키니 내세운 파격 연출

1997년 취임한 브라보 CEO는 브랜드 개조 작업에 나섰다.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가 버버리 격자무늬 비키니를 입고 등장하는 광고 캠페인을 벌였다.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강한 버버리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젊은이들에게 ‘쿨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매출은 급증했다. 소비자 평균 연령도 낮아졌다.

대중화를 버리고 고급화에 매진했다. 런던 본사의 매장을 업그레이드하고 뉴욕 매장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이보다 더 중요한 작업은 버버리 본사와 괴리된 프랜차이즈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일이었다. 버버리는 2000년 스페인 판매권을 되사들였고, 2002년에는 아시아에서의 판매 허가와 유통에도 통제를 가했다. 세계 모든 버버리 매장에서 통일성 있는 브랜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여성 패션 시장에도 적극 진출했다. 트렌치 코트의 디자인을 날렵하게 바꾸고 다양한 신제품을 개발했다.

크리스토퍼 베일리
크리스토퍼 베일리
브랜드가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격자무늬 관리’라 부르는 방안을 마련했다. 길거리 가판에 가짜 버버리 제품이 범람하면서 고급 소비자가 버버리 제품을 외면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가짜 버버리 제품이 시장에 나돌지 못하게 힘썼다. 버버리 직원들이 직접 중고시장이나 벼룩시장을 뒤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버버리 브랜드가 패션에 한물 간 상태인 ‘파세이(passe)’에 근접했다고 봤지만 버버리는 브라보 CEO 취임 이후 극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끊임없이 혁신해야 하고 잠깐의 승리에 만족해선 안 된다”며 “항상 무슨 일을 일으켜 계속해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감각의 ‘버버리 프로섬’으로 승부수

브라보 CEO가 회생의 기반을 마련했다면 버버리의 부활을 이끈 것은 2006년 취임한 아렌츠 CEO다. 아렌츠 CEO의 계획은 ‘새로운 버버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버버리의 상징이던 격자무늬 비중을 전체 상품의 10% 이하로 낮추는 모험을 감행했다. ‘말을 탄 기사’와 ‘토머스 버버리의 흘려 쓴 서명’을 새로운 로고로 채택했다. 아렌츠 CEO는 당시 “버버리가 종합 명품 브랜드로 도약하려면 트렌치 코트와 격자 무늬로 굳어진 브랜드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찌와 DKNY를 거친 35세의 버버리 수석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2001년 선보인 ‘버버리 프로섬’을 전면에 내세웠다. 기존의 버버리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버버리를 강조했다. 기존의 버버리가 정장에 주력했다면 버버리 프로섬은 캐주얼한 바지에 카디건, 미니스커트, 티셔츠, 니트 등을 망라한다.

새로운 버버리 코트에는 꽃무늬가 들어가기도 하고 금색, 노랑, 핑크, 파랑, 녹색 등 화려한 색상도 쓰였다. 기존 H라인 대신 허리선을 살린 디자인으로 한결 가볍고 젊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머플러, 가방, 벨트 등 액세서리 부문을 강화한 것도 버버리 프로섬의 특징이다. 액세서리는 젊은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액세서리 라인은 전체 브랜드 매출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디자인을 책임지던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CEO로 올라선 버버리는 순항 중이다. 중국 등 신흥국 경기 둔화가 심화하는 가운데서도 버버리의 올 4~9월 세전이익은 1억5500만파운드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9% 늘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